이 책의 가장 독특한 기여 중 하나는 아마도 가능한 한 폭넓게 여러 학문 분야를 연결하여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는 점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틀 안에 조직신학 책이라면 으레 담고 있을 만한 전통적 요소들을 담았다. 하나님과 창조에 관한 신학의 이해, 하나님의 존재 및 무신론과 관련된 쟁점들, 인류와 오도된 욕망 및 소외를 다룬 신학,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 성령의 인격과 사역, 교회와 직무 및 성례, 마지막에 있을 일들을 다룬 두 장. 이 모든 내용은 성경을 꼼꼼히 주해한 결과는 물론,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주요 사상가들과 소통한 결과를 담고 있다.
_서문
우리는 특별히 일관성과 체계, 철학 탐구, 우연과 맥락 속에 자리한 성경의 내용, 개념 해명, 해석학, 사회학, 문학적 신학을 살펴보았다. 오늘날의 조직신학에는 이 모든 영역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우리의 신학 탐구와 진리 탐구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이 모든 영역을 활용해야 한다. 아울러 이 모든 영역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가 추구하는 목표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성찰과 기도, 성령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고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나누도록 도와줄 수 있다.
_1장 방법과 진리
우리가 악이라는 문제를 논할 때 언급했듯이, 몰트만은 그의 책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The Crucified God)에서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위젤의 이 글을 인용한다. “그(하나님)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거기 교수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솔직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한 개인이 혹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기쁨과 풍족함의 세월을 보내고 있든, 아니면 암흑과 절망과 핍박의 시간을 보내고 있든,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에서 그들을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다시 말하지만, 신학적 성찰이 가장 실제와 관련 있고 실제 삶과 연결된 관심과 확신을 불러일으킨다.
_3장 하나님과 세계
바르트 및 다른 이들이 강조하듯이, 성령의 증언은 성경, 사도 전통, 십자가의 메시지를 날마다 현실이 되게 해 준다. 판넨베르크의 말대로, 이것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새롭게 증명해 준다.” 다음 장에서 확인하겠지만, 합리적 성찰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이런 진리를 우리 스스로 공공연히 검증해 봤다. 우리가 살펴봤듯이, 초기 교부들은 다양한 문제 앞에서 성경에 근거한 합리적 믿음의 본보기를 제시했다. 결국 하나님 자신이 그가 주신 진리와 약속의 보증인이시다.
_4장 무신론의 도전
성경에서 제시하는 단어들을 연구해 본 결과는 죄가 주로 하나님의 규범을 따르지 않은 개인의 행위 문제가 아니라는 견해를 확인해 준다. 죄는 그보다 근본적 차원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향한 태도, 곧 예배와 신뢰와 순종과 사귐이 아닌 다른 것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판넨베르크는 이를 강조한다. 이런 상태는 무엇보다 경건함이 없는(godlessness) 상태다. 이는 무엇보다, 오늘날 많은 이(꼬박꼬박 교회에 다니며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 이외의 사람들)가 종종 주장하는 것과 달리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과 관련된 차원이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측면은 죄가 가져오는 파괴적 결과다.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킨다.
_6장 인간의 잠재력과 하나님의 형상
우리가 로버트 펑크(Robert Funk),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1985년에 창립된) 예수 세미나를 고찰해 보든, 게자 베르메쉬(Geza Vermes), 앤터니 하비(Anthony Harvey), M. 보그(Borg)를 고찰해 보든, 아니면 이들보다 스펙트럼에서 보수 쪽에 더 가까운 제임스 던, N. T. 라이트, 리처드 보컴, 벤 위더링턴(Ben Witherington)을 고찰해 보든, 이들은 모두 예수가 처했던 역사 맥락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하지만 이런 역사와 사회의 맥락을 어떻게 서술해야 가장 좋은지는 여전히 쟁점으로 남아 있다.
_10장 간략한 기독론
이런 주제들은 바울이 사용하지 않고 근거가 박약한데도 대중들이 그냥 사용하는 ‘영성’ 같은 용어와는 반대다. 이런 용어들은 위에서 내려오시는 성령과 관련된 것을 나타낸다기보다 아래에서 올라가는 종교적 열망을 나타낼 뿐이다. 아울러 이 결론에는 성령의 인격과 사역이 자리한 삼위일체 맥락,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경이 임재하신다는 것과 성령이 이들에게 주시는 여러 선물, 성령의 거룩하심, 해석학이 성경의 몇몇 핵심 본문과 맺는 연관성이 포함될 것이다.
_11장 성령 1: 성경의 가르침
서로 관련이 있는 교회, 사역, 성례에 관한 교리들은 성경, 유대교,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공동체 차원의 지평으로부터, 이전에도 하나의 철학 유산으로 있었고 특히 19세기 이후로 우리가 살아가는 산업과 시장 소비 중심의 경제 체제 속에서 등장했던 개인주의로 옮겨 가는 엄청난 해석학적 전환과 싸워야 했다. 많은 이는 근대 개인주의가 데카르트(1596-1650) 에게서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확실한” 지식을 추구했고, 홀로 틀어박혀 자신만의 “절대 확실한” 그리고 “자명한 지식”을, 다시 말해 그의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을 만들어 내는 쪽을 택했다.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이런 데카르트식 외톨이 개인주의를 비판했다.
_13장 왜 교회, 사역, 성례인가?
우리가 믿는 그대로, 하나님 바로 그분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와 숙고의 초점이시라면, 성령이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우리의 인식과 이해를 깊게 하시고 넓혀 주시지 않겠는가? 때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우리의 모든 잘못된 행위와 실수와 죄를 다시 떠올릴까봐 불안해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바로 그분과 죽임 당한 어린양의 경이와 영광을 깊이 생각하는 일에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몰두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여전히 이 땅에 있는 이들의 실수나 잘못에 마음을 빼앗기겠는가? 때로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히 12:1)을 언급한 것 때문에 오해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이지 우리를 증언하는 증인이 아니다. 이들 역시 “예수를 바라보며”(히 12:2), 예수를 바라보는 일은 히브리서의 모든 본문에서 강조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_15장 마지막 심판, 영원, 만물의 회복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