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영화 제목이 ‘따뜻한 심장’ 아니냐. 말라위가 바로 아프리카의 따뜻한 심장이라고.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도 있어. 호수가 국토의 1/5을 차지해. 너도 반할 거야.”
태환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굳이 반대의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럼 함께 로케이션 헌팅하러 가는 거다?” --- p.8
“됐어. 매번 거절할 땐 언제고. 9월과 10월 사이엔 활동하지 않는다며?”
정하라. 사진과 영상으로밖에 보지 못했지만, 태환의 머릿속에 새겨진 그녀는 한마디로 정의된다. 건방지다! 내로라하는 배우도 자신들과 작업하고 싶어 매달리는데, 신인 정하라는 시나리오를 읽지도 않고 배역을 사양했다. 9~10월 사이에는 활동하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며. --- p.10
저리도 아름다운 피사체가 몇 년 전만 해도 헐렁한 의사 가운에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팠다. 상원은 불의의 사고로 외과 의사의 꿈이 좌절된 유하연을 지금의 여신 정하라로 키워냈다.
그런데 그 보석이 지금 아프리카로 연중행사를 떠나신단다. 고인이 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의료 봉사를 하겠다는데, 뭐라 반대할 수도 없고. 오지로 떠났다가 혹시 어디라도 잘못될까 봐, 상원의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 p.12
세상에나! 뿔테 안경에 입이 돌출되는 교정기까지 끼자, 아름답던 여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180도 다른 이미지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책만 들입다 파는 공부벌레 이미지랄까? 하연의 이런 모습, 이젠 적응할 법도 한데 상원은 ‘아주머니, 누구세요?’라고 물어볼 뻔했다. --- p.13
‘엄마야? 분명 한국말인데…….’
태환은 반사적으로 휘청거리는 여자에게 손을 뻗었다. 먼 타국에서 들려온 한국말이 반갑긴 했지만, 은근히 소름 돋게 하는 허스키 보이스였다. 여자에게선 달콤한 향기가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음, 재스민 향인가? --- p.16~17
태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땅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집어 들었다. 여권과 다른 물품은 모두 고스란히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언제 뒤졌는지 지갑에 있던 현금만 사라진 상태였다. 가방의 지퍼를 잠그던 태환은 문득 자신이 외진 곳까지 따라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21
쫘악―. 하연은 셔츠의 양쪽 깃을 잡아 단번에 옆으로 찢어 버렸다. 서둘러 셔츠를 벗겨내자 상처가 드러났다. 적당히 근육이 붙은 탄탄한 복근 옆으로 살이 벌어진 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 p.26
“그쪽은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어떻게, 납치를 해도 의사를 납치했대?”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다니. 허구한 날, 응급실에서 밤새도록 응급 환자를 돌보던 경험이 이런 상황에서는 꽤 쓸모가 있었다. 돌발 상황 중에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납치한 거 아닙니다. ……도움을 청……한 거지.” --- p.27
할 수 없이 하연은 해열제가 녹은 물을 한 모금 입에 물고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었다. 그리고 어르고 달래듯 그의 뺨을 손등으로 어루만졌다.
“……음.”
처음엔 완강하게 거부하던 그의 입술이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굳게 닫혔던 입술에 조그만 틈새가 벌어지자, 하연은 입에 머금은 약물을 재빨리 그의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 p.34
태환은 열에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안하게도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허스키한 속삭임도, 달콤한 재스민 향도 느낄 수 없었다.
돌아온다고 했는데……. 빨리 온다고.
태환은 손에 목걸이를 꼭 움켜쥔 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p.45~46
넓은 어깨와 쭉 뻗은 다리, 군살 하나도 없는 몸매로 봐선 절대 일반인은 아니었다. 주성욱 씨가 온다는 말은 못 들은 것 같은데……. 그보다 좀 더 키가 큰 것 같기도 하고.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남자가 천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헉!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하연은 정신이 아찔해지며 눈앞이 하얗게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그 남자다! 갑자기 사라져 애타게 했던 남자가 지금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어떻게 여기에? --- p.64
맞아! 정하라에게서 그녀와 같은 향이 느껴졌다. 그녀와 손을 맞잡는 순간, 움찔 몸이 굳은 이유도 모두 그 탓이다. 재스민, 아찔하게 달콤한 그 향 때문에……. 그녀 옆에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창가에 머물렀던 것도 그래서였다. 낯선 여자에게서 왜 그녀의 향이 느껴지는 걸까? --- p.72~73
그때였다. 태환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재빨리 그녀의 얼굴에 씌워버렸다. 뭐지? 하연은 멍한 표정으로 두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곧 자신의 얼굴에 두꺼운 뿔테 안경이 씌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찾았다.”
방금까지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태환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 p.342~343
“아직도 내가 한 말 못 알아듣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거. 감촉이 눈보다 훨씬 더 정확할 수 있다는 거.”
태환은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 쥐며 흔들리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 위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금 이 감촉이 당신이 그녀라는 걸 증명하니까.”
--- p.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