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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

알마 인코그니타이동
에르베 기베르 저 / 김현 해설 / 장소미 | 알마 | 2018년 11월 23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0 리뷰 2건 | 판매지수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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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11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296쪽 | 364g | 130*213*20mm
ISBN13 9791159922312
ISBN10 115992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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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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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만 무성하던 질병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처음으로 꺼낸 이는 빌이었다. 1981년이었을 것이다. 빌은 출장차 다녀왔던 미국에서, 관련 잡지를 들추다가 그 질병으로 발생한 죽음에 관한 첫 임상 보고서를 읽었다. 그는 스스로도 반신반의하며 무슨 미스터리라도 되는 것처럼 그 병을 언급했다. 빌은 백신을 생산하는 대형 제약 연구소에서 관리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튿날 나는 뮈질과 단둘이 저녁을 들면서 빌이 퍼뜨린 공포스러운 소식을 전했다. 뮈질은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다가 급기야 몸을 비틀며 소파 밑으로 굴렀다. “동성애자들만 걸리는 암이라니. 허무맹랑한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웃겨 죽겠네!” 그때 뮈질은 이미 에이즈 원인 바이러스인 레트로바이러스에 감염되었던 듯하다. --- p.20

1983년 가을, 뮈질은 세미나에서 돌아와 각혈을 했고 밭은기침 속에서 점차 쇠약해졌다. 하지만 기침하는 사이사이 샌프란시스코의 사우나에서 벌였던 마지막 광란을 회상하며 즐거워했다. 나는 말했다. “에이즈 때문에 거기도 이젠 쥐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가 대답했다. “모르는 소리. 외려 사우나에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몰린 적은 일찍이 없었어. 그야말로 특별해진 거지. 그곳에 감도는 위험이 새로운 공모감과 새로운 애틋함, 새로운 결속감을 만들어냈거든. 전에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던 이들이 이젠 대화를 해. 다들 자기가 왜 거기에 와 있는지 아주 잘 아니까.” --- p.30

1983년은 쥘이 멕시코에서 목의 림프절종으로 고생한 해였다. 1984년은 마린 그리고 내 편집자가 나를 배신한 해이자, 뮈질이 죽은 해였고, 일명 ‘이끼절’이라고 하는 교토의 사원 사이호지에서 소원을 빈 해였다. 1985년은 우리의 이야기에서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않는다. 1986년은 사제가 죽은 해였다. 1987년은 대상포진이 발병한 해였다. 1988년은 절망적인 가운데 내 병을 발견하고 석 달 뒤, 내게 구원을 믿게 했던 우연에 희망을 건 해였다. 스테판에 따르면, 잠복기가 네 해 반에서 여덟 해에 이르고 이제는 자각하게 된, 그 여덟 해에 걸쳐 내 곁에 어른거리며 나를 위협하던 그 병의 징조들의 연대기에서 육체적 이상--- p.異常)들은 성적인 만남들보다 덜 결정적이지 않았고, 예감 또한 그 예감들을 지워버리려는 시도였던 기도보다 덜 결정적이지 않았다. 이 연대기는, 병의 진행이 방탕에서 비롯되었음을 발견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의 도식이 되었다. --- p.64

뮈질에게서 『명상록』 판본을 받으면서 알게 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선배들, 그리고 가족 구성원, 스승들, 특히 죽은 이들에게 먼저, 그들이 그의 존재에 가져다준 것과 가르쳐준 것에 대해 각각 특별한 헌사를 바쳤다. 그러자 몇 달 뒤 죽게 될 뮈질이 자기도 다음 책에선 그런 식으로, 내게 바치는 헌사를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준 것이 없는 내게. --- p.81

신호음이 떨어지기도 전에,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억제된 숨소리가 느껴졌다. 내가 말을 하려는 순간, 전화가 끊겼다. 나는 침대에 누운 자세였다. 배신의 조짐에 순간 복부에 말뚝이라도 박힌 듯한 통증을 느꼈다. 침대의 네 다리가 마린이 작동시킨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돌며 나를 고문했다. 다음 날, 리샤르를 만나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한 끝에 마린이 변심한 이유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는 어느 정도 한물간 미국인 백만장자 배우와 연애 중이었던 것이다. 그는 마린에게 혼인증명서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그녀의 꿈이었던 미국 영화 세 편의 주연 자리를 약속했다. --- p.90

내 일기의 목적이 어쩌면, 이 점이 가장 혐오스러운데, 어쩌면 뮈질보다 오래 살아남아서, 그가 자기 속에 단단히 품은 비밀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불투명하게 반짝이는 검은 다이아몬드의 매끄러운 면들만을 남겨둔 채,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진실을 증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일기가 그의 전기--- p.傳記)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진정한 애물단지가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p.104

불행한 자에게 가장 심한 욕이 되어버린 6월의 태양으로 환한 병원 앞마당에서, 나는 처음으로 뮈질이 이제 곧 죽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테판에게 들었을 땐 믿고 싶지 않았었다. 그런 확신이 들자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틀린 내 얼굴이 눈물 속으로 흘러내리며 형체를 잃더니 나의 절규 속에서 갈가리 찢겨 흩어졌다. 미치도록 고통스러웠다. 나는 곧 뭉크의 [절규]였다.--- p.109?110

아울러 그는 뮈질의 죽음 때문에 자기가 이토록 잘생긴 남자들로 가득한 이토록 멋진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사실에 극도의 죄책감을 느꼈노라고 털어놓았다. 당연히 나는 그 여름에, 수영을 한 뒤 바위 위에서 알몸으로 내 옆에 나란히 누워 일광욕을 하던 귀스타브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 그 병으로 죽을 거야. 나, 너, 쥘,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 모두가.” --- p.124

이제 와 고백하건대, 나는 마린의 에이즈 감염 소식을 소문이 아닌 진실로 받아들이고서 기뻐했다. 사디즘 때문이 아니라, 혹자들이 남매라고까지 부를 정도였던 우리가 공통의 운명으로 단단히 결속되었다는 환상 때문이었다. --- p.138

순간 나는 우리에게 불행이 들이닥쳤다는 것을, 우리가 미처 빠져나갈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왕성한 불행의 시기를 맞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검사 결과에 화상을 입어 겉으로는 서 있는 듯 보였지만 사실상, 계속해서 쩍쩍 갈라지는 보도의 파편 위에 쓰러져 있었던 그 불쌍한 녀석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 자신에게 한없는 연민이 느껴졌다. 내가 가장 무서웠던 것은, 쥘이 사형선고에 대비하여 내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고자 얘기했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는 여전히 우리의 검사 결과, 혹은 어쩌면 자신의 검사 결과가 음성일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는 것이었다. --- p.156

죽음은 내게 끔찍하게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잔혹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죽음과 관련된 그 모든 잡동사니들이 혐오스러워졌다. 나는 의과대학생용 두개골을 치워버리고 공동묘지는 페스트라도 되는 양 피했다. 죽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마치 죽음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그런 겉치레 따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이젠 오직 더욱 깊어진 죽음과의 친밀감만이 필요하다는 듯. 나는 계속해서 끈질기게 죽음의 감정을 찾아나갔다. 세상 무엇보다 고귀하고 혐오스러운, 그 공포와 갈망을. --- p.160

샹디 박사는 처음부터 경고했었다. “현재로선 딱히 에이즈 치료제라고 할 만한 게 없어요. 그저 증상이 생기면 그때그때 적절히 치료해나가는 수밖에. 그러다가 마지막 단계가 되면 그때부턴 지도부딘이 있는데, 그건 한번 시작하면 끊을 수 없소.” 그는 “죽을 때까지”라고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없을 때까지”라고 말했다. --- p.179

수첩의 날짜를 다시 세어보았다. 쥐라 거리에서 내 병을 최종적으로 선고받았던 1월 23일과,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받아들였던 첫 번째 선고를 결정적으로 뒤집을 수도 있다는 두 번째 선고가 내려진 3월 18일 사이에 56일이 있었다. 사형선고를 확신하며 즐거워하다가도 절망하고, 잊었다가도 지독한 강박에 시달리는 것에 길들여진 56일을 살아낸 참이었다. 나는 이제 어쩌면 이전 단계보다 더 가혹할지도 모를 정지와 희망과 불확실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 p.189

쥘은 우리가 감염되었다는 것을 몰랐을 때 내게 에이즈는 멋진 병이라고 말했었다. 실은 나 또한 에이즈의 잔혹함에서 감미롭고 황홀한 무언가를 보았다, 내게 에이즈는 분명 잔혹한 병이었으나 급격한 것이 아니라 기나긴 계단을 통과해야 하는 단계적인 병이었다, 기나긴 계단은 영락없이 죽음으로 이어졌지만 각각의 칸은 비할 바 없는 죽음의 수련이었다, 에이즈는 죽을 시간이 주어지는 병이었다, 요컨대 죽음에게 살 시간을, 시간을 발견할 시간을, 그리하여 마침내 삶을 발견할 시간을 주는 병이었다, … --- p.193

나는 그 아이들을 내 육신 이상으로, 비록 사실이 아니더라도 내 육신을 통해 낳은 아이들처럼, 피를 나눈 것 이상으로 사랑했다. 어쩌면 HIV로 인해 그들의 피 속에 내 자리가 있을 수도 있으니 음울한 의미로서 피를 나누었다는 것이, 피로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 비록 나는 제발 그렇게 되지 않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고, 그들과 나 사이에 어떤 접점도 없도록 나의 피를 그들의 피로부터 분리시켜달라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웠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이 그들을 나의 절망 속 가시적인 피의 바다에 빠뜨리고 있었다. --- p.227

내 손에 밋밋하고 성실하며 두툼한 책 한 권이 놓였고, 나는 읽기도 전에 그것이 불완전하고 불순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 입술을 달싹이는 진정한 첫 문장, 그러나 내가 진정한 저주인 양 매번 가능한 한 내게서 멀리 밀어내고 잊으려 했던 그것과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당한 전조였고, 나는 글로써 그 문장의 효력이 발생할까 봐 두려웠다. “불행이 우리를 덮쳐야만 했다.” 그래도 써야 했다, 끔찍스럽게도, 내 책이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서. --- p.237

그 순간 우연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 달 전부터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해골로만 보이던 내가 놀라우리만치 잘생겨 보였다. 문득 어떤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거울을 볼 때마다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라 내 시체의 것으로 느껴지던, 야윌 대로 야윈 저 얼굴에 익숙해졌어야 했다는 것을, 그리고 나르시시즘의 극치에 의해서든 나르시시즘의 중단에 의해서든 결국 저 얼굴을 사랑했어야 했다는 것을. --- p.259

빌은 우리의 세계에 속해 있지 않고, 우리 편도 아니에요. 절대 영웅은 될 수 없는 인간이죠. 영웅은 죽어가는 이의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거든요, 선생님처럼. 그 죽어가는 이는 어쩌면 저고요. 빌은 누가 됐건 절대 죽어가는 이의 곁에 있어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기엔 너무 겁쟁이거든요.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누워 있는 친구한테 갔을 때도, 보다 못한 그 친구의 형이 빌을 쿡 찌르며 친구와 대화해보기를 권하자 마지못해 아주 잠깐 친구의 손을 잡았다가 겁에 질려 이내 놓아버리더니 그 뒤로 다시는 병문안을 가지 않았죠. --- p.283

나는 내 책의 액자 구조 속에 갇혔다. 진퇴양난이다. 대체 내가 어디까지 침몰하기를 바라는가? 차라리 목을 매고 죽어버려, 빌!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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