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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다이빙하는 남자 꺼질 듯 바람계곡 복수는 한발 늦게 온다 얼룩말 반디, 검은 망사 커튼 그리고 늙은 말 쥬리엣의상실 남보랏빛 그림자 가슴을 바꾸다 물에 잠긴 지하계단 비스듬 야채 가게 흑설탕을 넣은 차 물이 빠진 수영장 조개잡이 빛의 통로 별무늬 판화 우리 동네 무기밀매업자 검은 피리를 부는 밤 포도밭, 그 애 마른 잎을 파는 가게 나무 위의 고양이 괘종시계가 울리는 밤 복도식 아파트 짤랑짤랑 자물쇠들 물렁한 도마 오렌지 마멀레이드 물의 도시 자기소개서 층층 캐비닛 원숭이 손가락 사금파리 반짝 빛나던 길 갱스터 파라다이스 나무 관을 짜는 남자 아주 오래된 게임 빨간 어묵 각설탕 지붕 위의 시체 샤워기가 있는 감방 여우 묘가 있는 마을 없는 가게 무중력 항공사 폼페이에서 보낸 마지막 날 얼룩 고양이 유리동물원 까마귀가 나는 밀밭 검은 표지의 파일 물러터진 토마토 덤프트럭 깊은 동굴 손잡이 해설 | ‘없는 가게’의 빈 의자에서 시 쓰기 | 김수이(문학평론가) |
사금파리 반짝 빛나던 길
인부들이 담배 피우러 나간 사이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통째로 훔쳐갔다는 건데 숲 속 공터에 책이 꽂힌 책상이며 손때 묻은 소파까지 여자가 살던 집처럼 해놓고 남자는 너럭바위에 앉아 생무를 베어 먹은 것처럼 달지도 쓰지도 않게 웃었다고 합니다 꼭 같이 사는 것처럼 물방울무늬 원피스가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는데 경비 아저씨의 푸른 모자가 아파트 화단에 떨어져 있는 날이었습니다 다이빙하는 남자 중세시대 사제 복장을 한 남자가 바다가 보이는 절벽에서 몸을 던진다 이복동생을 사랑한 사제가 몸을 던졌다는 검은 절벽 그녀를 태운 배가 백 년 전 거품으로 사라져버린 곳 그러나 비극은 되감기 버튼처럼 가짜 사제가 능숙하게 절벽을 기어오르고 각설탕 같은 이빨을 반짝이며 시작된다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로 뛰어든 비운의 사내는 잘게 부서지는 포말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흠뻑 젖은 사제복을 입은 그는 이 도시의 명물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을 물방울무늬로 포장해주는 기념품 가게도 있다 근처 절벽에 있는 ‘다이빙하는 사제’ 레스토랑에선 핏물 번지는 스테이크를 썰며 지루하게 반복되는 저렴한 비극을 감상할 수 있다 감청색 잉크에 펜촉을 꽂듯 비극은 선명하고 희미한 습관이 된다 --- 본문 중에서 |
뒤틀린 세계의 상실과 부재.
그 없는 것들이 “꼭 같이 사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다가온 시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높아지는 것들이 있다. 의미 있는 건축물과 숙성될수록 깊은 향취를 가지는 술 등이 그렇다. 물론 시간만 흐른다고 저절로 그것들의 가치가 오르는 것은 아니다. 보존과 숙성을 위해 정성껏 어루만지는 손길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 시도 이와 비슷한 지점이 있다. 오래 들여다보고 다듬을수록 더욱 깊어지는 감각이 있는 것이다. 빠르게 진행되는 변화 속에서 역시 빠르게 소비되고 마는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요즘, 그 속도에서 잠시 빠져나와 공들인 시간이 빚어낸 깊이에 잠시 빠지고 싶은 독자에게 선물처럼 다가온 한 권의 시집이 있다. 임현정은 2001년 『현대시』로 등단하여 시인으로 12년을 살았다. 그리고 드디어 첫 시집 『꼭 같이 사는 것처럼』으로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젊은 시인들이 등단 2, 3년 만에 첫 시집을 내고 주목을 받는 것에 비하면 아주 느린 걸음이다. 그러나 시집을 펼쳐보면 그 숙성의 시간이 시 안에서 얼마나 빛을 발하는지를, 독자들은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더디게 찾아와 더욱 귀한 임현정의 첫 시집이 갖는 힘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깊이 응시하고 있는 시 문학평론가 김수이는 이번 시집의 해설에서 “입구와 출구, 심연과 표면, 전과 후 등등이 사라진 무한 연쇄와 반복이” “타당한 질서이며 유일한 지형도롤 자리 잡는” 이 세계에서, “임현정의 시는 세계 자체를 결여한 세계에서 태어나는 마이너스 세계의 시, 존재 자체를 결여한 존재가 빚어내는 마이너스 존재의 시, ‘시의 시간’의 불가능성을 직시하는 시인의 빈곤한 시간을 본뜨는 마이너스 시간의 시”라고 역설한다. “증발해버린, 부재하는 시의 시간 자체를 시의 육체로 삼”아 “근원을 상실한 현대시의 운명 자체를 시화하면서 그로부터 새로운 시의 시간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고서 시인은 “소유한 적 없는 것들의 부재와 끝없는 상실의 와중에 있는 세계에서 텅 빈 ‘그것’을 어떻게 투명하게 응시할 수 있는가를, 그 ‘없는’ 의미에 꼭 맞는 단어와 수사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무한한 수고가 왜 필요한 것인가를 천천히 헤아린다.” 바로 여기에서 공들인 시간의 깊이가 이 시집 안에서 어떻게 형상화되는 것인지 가늠하게 된다. 마침내 “꼭 같이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 흠뻑 젖은 사제복을 입은 그는 이 도시의 명물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을 물방울무늬로 포장해주는 기념품 가게도 있다 근처 절벽에 있는 ‘다이빙하는 사제’ 레스토랑에선 핏물 번지는 스테이크를 썰며 지루하게 반복되는 저렴한 비극을 감상할 수 있다 -「다이빙하는 남자」 부분 아무 때나 오세요 좋아요 또 오세요 검은 머리를 내려뜨린 낡은 옷장이 말합니다 여기는 흘러간 것들로 치렁치렁한 쥬리엣의상실 쥬리엣 의상실이 아니라, 쥬리엣의 상실이랍니다 -「쥬리엣의상실」 부분 폼페이 유적에는 빈 구덩이로 남은 사람들이 있다지 살과 뼈가 삭아내린 그 구덩이에 석고를 부어 웅크리고 죽은 여자를 떠냈다지 얼굴을 어깨에 묻은 채 울고 있는 배가 부푼 구덩이도 있었대 -「폼페이에서 보낸 마지막 날」 부분 끔찍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뒤틀린 세계에 존재하는 상실과 부재. 임현정이 이번 첫 시집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은 지독한 응시를 통해 그것들의 목록을 담아내는 일이다. 지금 여기 텅 빈 부재의 공간에 석고를 부어 그것들을 떠내는 일을 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래 바라볼수록, 오래 정성을 들일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작업.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쥬리엣 의상실이 아니라,/ 쥬리엣의 상실”이기에 응시의 시간은 오롯이 시에 스며들어 구덩이 같은 깊이로 자리한다. 그것은 이미 없는 것이지만 임현정의 시로 인해 다시, 있는 것이 된다. 마침내 상실과 부재의 목록들이, 그 ‘없는’ 것들이, 지금 여기 시로 다가와 “꼭 같이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임현정의 시에 깔려 있는 것은 이 세계의 빈 구멍들과 “후미진 곳”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단편적이고 단면적인 시선을 경계하면서, 세계의 불가해한 양상들을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그리고 조금은 애잔하다. 마른 잎이 뜨거운 물에 풀어져 모양과 향기가 되살아나는 시간. 너무나 어렵게 존재의 눈앞에 당도한 ‘시’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이 세계에서 임현정은 그 자체가 바로 시의 시간임을, 그것을 견디고 끝내 써내는 것이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시의 시간임을 이?기한다. _김수이 해설 「‘없는 가게’의 빈 의자에서 시 쓰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