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 중 하나는 배역에 대한 이해가 삶의 경험을 그만큼 확대해준다는 사실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일도 극작을 하는 일도 연출하는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연기자가 다양한 층위의 삶을 넘나들며 한 경험이 어찌 보면 실제 경험보다 더 큰 경험의 확대를 불러올 수도 있다.
돈이 있으면 세계 여행을 마음껏 다니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연기자는 돈이 없어도 시공간을 초월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오늘은 햄릿을, 내일은 리어왕을, 모레는 뜨레블레프를, 그리고 다음 주엔 연산군을 연기할 수도 있다. --- p. 21
1차를 통과할 실력이 된다면 한예종 입시는 결국 의지의 싸움이다. 연기과 6,000명 중 35~40명, 영화과 780명 중 30여 명을 뽑는 입시다. 누구든 실패할 수 있는 시험이다. 냉정하게 평가하고 잘못된 점을 수정해서 다시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붙을 것이다. 매년 시험은 계속되고 있고 1년은 너무도 짧다. 1년이란 시간은 포기하기엔 너무 짧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도 적절한 시간이다. 올림픽을 생각해보라. 4년에 한 번 있는 기회를 단 한 번의 실수로 놓친 선수들을 떠올려보라. 다시 4년을 기다려서 결국엔 승리하고 마는 선수들을 생각해보란 것이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하는 만큼 점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공무원 시험이나 수능과 달리 예술 입시가 힘든 점이다. 연기 입시에서는 키, 외모, 분위기 같은 외적 요인을 보게 마련이다. 그래서 예술 입시 준비는 더욱더 현실적으로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백전백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 p. 29
연극 신동, 영화 신동을 들어본 적 있나? 그딴 게 있을 수 없는 거다. 문학 신동이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연극과 영화에서 재능은 곧 관점이자 구조이며 언어이자 세상을 향한 관심이다. 치열함이자 견뎌내는 뚝심이고 애정이다. 결국 인간을 향한 통찰인 거다. 그런데 이 통찰도 사실상 재능이다. 능력인 거다. 자꾸 맞아떨어지는 쾌감이 있다는 거다. 내가 바라보는 관점과 구조와 표현이 하나둘씩 맞아떨어질 때마다, 예술적 성취를 이룰 때마다, 마치 마약처럼 더 깊은 창작과 몰입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기쁨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환경의 어려움은 이제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결국 능력이 중요하다. 너의 통찰이 예리하면 예리할수록 예술에 중독되어 갈 것이다. 좋아하기에 잘하는 게 아니라 잘하기에 좋아하게 되는 거다.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너의 성취가 너를 중독시킨다. 그래서 실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 p. 59
맙소사. 그런데 이를 어쩌나? 너는 6,000명의 연기과 지원자 중의 한 명일 뿐이다. 네게 허락된 시간은 짧게는 20초에서 길어봐야 2분을 넘지 않는다. 1년 준비하고 수백만 원의 학원비를 들였는데 단 20초 만에 결과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제발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너한테야 급한 일이지, 너한테야 생사가 달린 일이지만, 교수 입장에선 너도 다른 6,000명의 지원자 중 한 명일 뿐이다. 너의 모든 가능성을 교수가 꼼꼼히 살피는 것이 아니다. 학원선생님들처럼 너의 진짜 내면을 통찰해주고 “사실 겉보기는 그래 보여도 속은 참 괜찮은 앤데…….”라고 말해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6,000명 중 한 명의 마음가짐으로 준비해야 한다. 고작 6,000명 중의 한 명일 뿐인 거다. 뭐가 중요할까? 잘 들어라. 하나를 준비해도 확실히 해야 한다. 당연하지. 네가 보여주는 건 아주 단순하고 짧은 것이니까 정말 확실해야 한다. 어설픈 거 여러 개, 조잡한 거 여러 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단 하나라도 정말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 단순함이 절실하다. 많은 걸, 복잡한 걸, 대단한 걸 준비하려 하지 말고 단 하나라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것으로 확실하게 준비해야 한다. 특기도 연기도 마찬가지다. 아주 짧은 시간을 보여줘야 하므로 기관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백발백중 저격수가 되어야 한다. --- pp. 102-103
입시는 단순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기준으로 입시를 준비한다. 그러다 보니 무리하게 된다. 면접을 지도하다 보면 모두 수긍하는 점이 한 가지 있다. 면접을 잘하는 학생과 못 하는 학생의 차이는 너무 크다는 것이다. 도무지 떨어뜨릴 수가 없는 면접을 하는 학생도 있고 도무지 합격시킬 수 없는 면접을 하는 학생도 있다. 이처럼 면접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치명적이다. 실기든 면접이든 요행은 없다. 전문가들의 시각은 비슷하기 때문이다. 붙는 학생들은 붙을 수밖에 없고 떨어지는 학생들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글이건 면접이건 전문가들의 눈은 비슷하다. 스토리를 보는 눈에 관한 한 나와 다른 선생님이 크게 다르지 않아 때때로 놀라곤 한다. 글쓰기 수준은 더욱 그렇다.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 사람들은 누가 봐도 비슷한 평가를 할 정도의 글들이 많다. 입시는 교수의 기준으로 생각해야 한다. 50대의 최소한 석사 이상의 학력을 가진 예술대학 교수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기본과 공감 그리고 다른 학생과 차별화되는 한두 가지 전략. 이것이 내가 입시를 지도하는 기본 틀이다. --- p. 139
영상원 시험 역시 1차가 중요하다. 수치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 2018년도 입시에서 영화과가 30명 모집에 약 780명 정도가 지원했다. 그중에 1차 합격자는 120명이었다. 그러면 단순 값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780 : 30이다. 다소 막연해지지만 1차 합격 후 4 : 1이라고 해보자. 어떤가? 대학입시로서는 한 번 도전해볼 만한 수치가 아닌가?
사실 한예종 입시에서 4 : 1이라는 경쟁률은 외국인 특별전형에서도 나올 수 없는 수치다. 그만큼 절대적으로 유리해진다는 것이다. 4 : 1이라……. 이 경쟁률만 통과하면 평생 영화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국립예술대학 영화전공 라이센스를 취득하는 것이다. --- p. 170
한예종 영화과 기출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게 공간적 디테일이다.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여러분이 만드는 서사의 인물들도 환경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 공간은 무엇인가? 나는 궁금하다. 여러분이 창작한 그 환경과 공간이! 그렇다면 내 말은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고 본다. 작년 영화과 기출을 봐도 창의적인 건 대단한 무언가를 비약적으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끈질기게 질문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사의 빈틈, 그 디테일을 채워나가는 ‘빈틈 찾기’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말을 한 마디 용어로 정리 가능하다. 그게 바로 미장센이다. 인물의 디테일, 공간의 디테일, 서사의 디테일, 관계의 디테일 모두 미장센이란 용어 하나로 수렴된다. 작은 게 작은 게 아니고 사소한 게 사소한 게 아니고 별것 아닌 게 별것 아닌 게 아니다. 너의 작은 경험, 작은 관찰, 작은 고민, 작은 질문……. 그 모든 게 합격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디테일이다.
--- p. 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