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는 마음으로 ‘어머니’
오늘도 내 인생의 시간을 다시 만나지 못할 것처럼 사랑하렵니다.
다락방기도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 매주 수요일에 한다. 누가 시킨다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고막리 다락방 식구들은 수요일 2시가 되면 어김없이 고막리 189-1번지, 우리 집으로 온다.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기도시간에 모여드는 모습은 참 신기하기도 하고, 바로 이 모습이 기적이 아닐끼? 하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 다락방기도 식구는 열 명이 넘었다.
좁을 거실에 빽빽이 둘러앉아서 힘찬 목소리로 차분하면서도 진지하게 기도문 한 문장 한 문장에 호흡을 같이하며 기도하는 모습은 정말 감동이다.(본문 19쪽)
‘내가 항상 너희와 있으니 모든 이에게 나의 자녀임을 나타내 보여라.’
성령송가, 다락방기도의 뜻을 되새기는 성서봉독, 묵주기도 5단, 교황님을 위한 기도, 곱비 신부님을 통해 주신 성모님 메시지 읽기, 성모님 메시지에 대한 영적 대화,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께 드리는 봉헌문 합송, 그리고 가슴 설레고 벅차오르는 마음을 모아서 어머니의 성가와 아침기도로 마무리 하는데 대략 한 시간 동안 한다.(본문 20쪽)
베로니카
우리가 넘어졌을 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준다면 일어나기가 쉽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자빠지면 땅을 짚고라도 아니, 죽는 힘을 다해 혼자서 일어나야만 한다.
곤궁할 때 누군가가 내밀어 주는 따사로운 글, 나에게는 그런 손이 곁에 있다.
70여 년 살아오는 동안 힘든 때가 많았다. 제일 힘들었던 때는 고막리에 이사 온 직후였다. 겨우 겨우 이사는 했는데 등록세, 취득세를 은행에서 단기대출을 받아 해결한 일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될 처지에 놓이고 말았었다.(본문 43쪽)
때 내 나이 40세, 아이들은 첫째가 중2, 둘째가 중1, 셋째가 초등 5년, 넷째 막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당시 남편은 회사(중앙신약)의 대표로 직원은 영업부 직원을 포함해 백 여 명으로 그 가족을 먹여 살려야하는 책임을 가진 중소기업인으로 회사가 빚은 있었으나 잘 나가는 제약회사였다.
낛시꾼 두 사람의 실종 소식은 서울 본사 메인 뉴스에도 나오고 그날은 해경이 헬리콥터와 배로 바다를 샅샅이 뒤지기는 했어도 끝내 시신은 찾지 못하고 스티로폴로 된 낛시 바구니만 발견했다.
며칠 후 나는 배 한척을 구해서 완도 앞바다에서 영혼을 건져온다는 ‘오구 ’굿을 했는데 하는 도중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풍랑이 심해졌다. 그러자 무당이 “.....하느님 살려주세요.”하면서 더 이상 배에서는 굿을 할 수 없으니 동화사로 옮기자고 했다. 무당도 급하니까 하느님을 찾고, 우리는 서둘러 동화사로 가서 굿을 계속했는데, 무당이 신이 오르니까, 남편 음성이 되어 나와 가족, 그리고 회사직원에게 일일이 지시를 하는 것을 보고 무당이 영매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98년, 나는 회사를 정리했다.
15년간 할 수 있는 일은 다해보면서 회사를 운영해왔으나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세상의 이치로 말한다면 나는 엄청난 손해를 본 것이지만 주님의 섭리로 본다면 나는 구원의 한 가닥 줄기를 잡은 셈이었다.
사실 그즈음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은 없었다.
머리가 빠지고 한쪽 귀는 들리지 않고 눈도 나빠져서 더는 일하기가 힘들어졌던 것이다.
나는 막내아들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는 벌어야하기에 남은 돈으로 80평짜리 수퍼마켓을 인수했다.
천 여평 공장에서 80평 수퍼를 하게 되었으니 나는 시간이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주님께 약속한대로 성당에 열심히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하던가.
80평 수퍼는 나를 더 꼼짝 못하게 했다.
당시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대구 동쪽, 수퍼는 서쪽 끝이었다.
나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장을 보고 수퍼에 출근했고, 직원들이 퇴근하고 정리를 하고 집에 오면 밤 12시가 다 되었다. 공장할 때보다 애들 얼굴보기가 더 힘들었다. 미사참여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고 나는 하느님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수퍼 단골 중에 젊은 엄마가 있었는데 같은 신자여서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 얘기를 했다. 그 엄마는 내 얘기를 듣고는
“자매님, 하느님 일을 먼저 두셔야 해요. 그렇게 약속도 하셨잖아요?”
“그런데...참 그러네...”
그녀는 수퍼에 오면 일부러 나를 ‘냉담 사장님’하고 부르면서 언제 냉담 푸실 것이냐 놀리기도 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