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할 중요한 단서가 있다. 옛 서구의 교회는 전통적인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야기와 반종교개혁 이야기들이 주로 근거로 삼고 있는 것만큼 엄청나게 부패한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잉글랜드에서 그랬지만, 잉글랜드와 불편한 이웃 관계였던 아일랜드와 같이 덜 예측 가능했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세 아일랜드의 교회 조직이 혼돈스럽고 역기능적이기는 했지만, 종교개혁이 있기 한 세기 전부터 특히 아일랜드의 서부 게일 (Gaelic) 지역 등에서 비상한 신앙부흥의 징조가 많이 있었다. 이 부 흥은 프란체스코(Francis) 수도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들은 아일 랜드의 서부 전역에 걸쳐 수도사들의 유산을 남겨 놓았다. 이 운동은 죽어가는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루터의 도움 없이 진행된 강렬한 변화의 과정이었다. 따라서 옛 교회가 비틀거리고 있어서 손끝만 대도 곧 넘어지고 무너질 것 같았다고 말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신화일 뿐이다. p. 22.
초대교회에 대한 크랜머의 독특한 역사적 상대주의(historical relativism)는, 양 극단의 분파주의 위협에서 교회를 지켜내려는 그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목표를 마음에 품은 크랜머로서는 부처와 칼빈의 발전된 교회론의 매력과 사도적 교회의 체계를 회복하려던 그들의 노력에 귀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 급진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외치던 것이 사도들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급진주의자들은 사도적 교회가 시민 정부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고 생각했으며(사실, 그들이 옳았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서구 기독교에 대해 행한 것들에 대해서도 솔직히 적대적이었다.
동시에, 다른 분파들에게도 적대적이었던 크랜머는 전통주의자 교회가 성경의 권위에 대항하여 ‘기록되지 않은 진리들’을 언급하는 오류를 통해 계속해서 거짓된 권위를 주장하는 것을 비난했다.
해법은 간단했다. 돌 하나로 두 마리 새를 모두 잡는 것이었다. 교회에 대한 그 어떤 독립적 권위나 정체성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크랜머가 1540년에 불거진 문제들에 대해 내놓은 해답이었다. p. 205
1550년대에 중요한 단계가 찾아왔다. 문화적, 언어적 배경을 불문 하고 다양한 망명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런던의 ‘나그네교회’(Stranger Church)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교회 감독은, 사실상 주교는, 다름 아닌 얀 라스키였다. 라스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1548 년에 찰스 5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에 ‘임시’(Interim) 체제가 시행 되자 동프리슬란트를 떠나 잉글랜드로 온 사람이었다. 잉글랜드 정부는 라스키의 리더십을 통해 망명자들 사이에 있던 신앙적 급진주의를 제어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상당히 큰 사례비와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교회들 중 하나인 어거스틴 수도회(Augustin Friars)를 주었다. 라스키는 교회를 잘 목회함으로써 잉글랜드가 어떻게 순수한 개혁파교회를 얻을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이것은 분명히 여러 잉글랜드 정치 지도자들의 의도였을 것이다). p. 331
두 개의 유럽 프로테스탄트교회들이 발전하고 있었다. 하나는 루터교회였고, 다른 하나는 루터교에 찬성하지 않은 사람들로서 취리히교회나 존 칼빈의 제네바에 더 의존하는 교회였다. 분명한 것은, 잉글랜드국교회, 스코틀랜드장로교회 그리고 아일랜드감독교회는 모두 루터교가 아니라 개혁파였다. 세 교회 모두에 주교들이 있었지만(스코틀 랜드장로교회는 1690년에 주교직을 폐지했다), 헝가리나 폴란드 또는 트란실바니아교회들과 같은 다른 개혁파교회들에도 주교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가 잉글랜드국교회의 차이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 있는 개혁파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했다. 엘리자 베스 1세의 마음 깊이 새겨진 이유들 때문에, 잉글랜드국교회는 대 성당을 고수했다. 이미 이 문제는 이 책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다. 다른 프로테스탄트교회들도 건물들을 유지했다(무슨 논리인지 모르겠 지만, 스코틀랜드장로교회들은 이미 3세기 전에 주교들을 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의 성당들을 지금도 성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잉글랜드를 독특하게 만든 것은 중세의 것들 모두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지방 부감독, 참사회, 성직록, 오르간, 성가대, 성당의 경내, 그리고 과세 등이다. 무엇보다, 살아 남은 것은 대성당 에토스였다. 즉, 아름답게 시행되는 예식과 신성한 음악을 주기적으로 행하는 풍습이었다. 대성당들은 이 고대의(매우 비프로테스탄트적인) 예식 행사에 토머스 크랜머『공중기도서』의 튜더 왕조식 산문을 추가시켰으며, 지금까지도 시행되고 있다. p. 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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