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천두슈陳獨秀, 1879~1942는 안휘 출생. 5·4신문화운동의 발기인이자 초대 중국 공산당 총서기. 1903년 상해에서 애국학사(愛國學社)를 조직했다. 1901년 일본에 유학 가 1906년 귀국한 뒤 백화보를 창간하여 교육활동에 종사했다. 1913년 위안스카이를 반대하는 무력활동에 참가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1915년 『청년잡지』(후에 『신청년』으로 개명)를 발간했으며, 1916년 북경대학 문과대학장으로 부임했다. 1918년 리다자오(李大釗)와 함께 『매주평론』(每週評論)을 창간하여 신문화를 제창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선전. 1921년 상해에서 공산당을 결성한 후 적극 활동했다.
저자 후스胡適, 1891~1962는 안휘 출생. 현대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문학가로 5·4신문화운동의 발기인. 원명은 쓰먼(嗣?). 1905년 15세에 학당에서 옌푸(嚴復)가 번역한 헉슬리의 『천연론』을 접하고 이름을 스(適), 자를 스즈(適之)로 고쳐 진화론 사상의 영향을 남겼다. 상해의 학당에서 공부하면서 처음 서구사상을 접했고 량치차오(梁啓超)와 옌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10년 20세에 북경에서 실시한 미국 관비유학생 시험에 합격, 그해 8월 출국하여 코넬 대학에서 농과를 전공하다 문과로 바꾸었고, 1915년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듀이로부터 실용주의 철학을 전수받았다. 1917년 귀국 후 북경대학 교수로 부임해 『신청년』 편집부에 가담했다. 1920~33년까지 주로 중국 고전소설 연구·고증작업에 몰두, 1949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가 대만으로 돌아와 1962년 별세했다.
저자 창나이더常乃德, 1898~1947의 본명은 나이잉(乃瑛),자는 옌성(燕生),필명은 판민(凡民), 핑성(平生) 등. 1916년 북경고등사범학교 사지부(史地部) 예과(預科)에 입학하였다. 5·4신문화운동 기간에 『신청년』에 글을 다수 기고하였으며, 5·4 이후에는 『국민잡지』(國民雜志), 『평민교육』(平民敎育) 등의 잡지를 발간하면서 사학자·교육사상가로 활동하였다.
저자 첸쉬안퉁錢玄同, 1887~1939의 본명은 샤(夏), 자는 중지(中季), 후에 쉬안퉁(玄同)으로 개명. 5·4신문화운동의 주창자이자 문자음운학자로, 어문개혁을 제창하며 한자폐지론까지 주장했다. 190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 중 장타이옌(章太炎), 추진(秋瑾) 등과 교류하며 동맹회에 가입. 1908년 루쉰(魯迅) 등과 함께 장타이옌에게 국학을 사사하고 음운학·훈고학을 연구. 1910년 귀국 후 북경고등사범학교·북경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며 1917년 『신청년』에 투고하기 시작하여 1918년 편집부에 참여했다. 1917년 국어연구회 회원, 1919년 국어통일주비회(國語統一籌備會) 회원, 1935년 국어추행위원회(國語推行委員會) 회원으로 활동하며 한자개혁운동에 앞장섰다.
저자 쩡이曾毅, 1879~1950의 자는 쑹차오(松喬). 학생시절 반청(反淸)활동을 하다가 1906년 일본으로 유학 가 메이지 대학(明治大學)에 입학하였고 동시에 동맹회에 가입했다. 1908년 귀국한 뒤 1912년 한구(漢口)에서 『민국일보』(民國日報)를 창간하여 위안스카이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헌정(民主憲政)을 선전하다 체포당했다. 프랑스 영사관의 보석으로 풀려나 일본으로 피신해 정치경제학 공부. 1915년 말 귀국하여 상해 『중화신보』(中華新報)의 편집장을 지냈다. 그해 그가 저술한 『중국문학사』가 상해 태동도서국(上海泰東圖書局)에서 출판되었다(1915.9.) 본문의 서신에서 말하는 ‘졸저’(중국문학 관련 인용문)란 이 저서를 가리킨다. 1917년 『신청년』에서 천두슈와 문학혁명에 관한 토론을 벌였고 1920년 이후 교육에 종사하며 호남성 의회 의원으로 활동. 1928년 금릉대학(金陵大學) 교수로 재직. 1930년 이후 국민정부 사법원 서기장을 지내다 1937년 낙향했다.
동성(桐城) 출신. 이름은 스차오(時喬) 또는 청(乘). 본문에 실린 「나의 개량문학관」을 발표하고 2년 뒤 북경대학 예과(預科) 국문과 강사를 지냈다. 1920년 일본 도쿄 대학으로 유학, 1924년 귀국 후 북경대학 및 여러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본명은 류소우펑(劉壽彭), 자는 반눙(半農). 5·4신문화운동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 저명한 문학가이자 언어학자이며 교육가. 1911년 신해혁명 참가, 1917년 북경대학 법과 예과(預科) 교수 겸 『신청년』 편집진으로 참여하면서 적극적으로 문학혁명을 제창했다. 1920년 영국 런던 대학원에서 실험어음학을 공부하였고 1921년 프랑스 파리 대학으로 옮겨 1925년 문학 박사학위를 획득한 뒤 귀국해 북경대학 국문과 교수로 부임했다.
생몰연대 미상
『신청년』 제3권 제3호 통신란에 기고한 글에서 “안휘성(安徽省) 제3중학교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바 있다.
생몰연대·약력 미상
자는 멍전(孟眞),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중국 고전문학 연구가. 1913년 북경대학 예과(預科)에 입학, 1916년 본과인 국문과에 들어가 후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본문에 실린「문학혁신의 의미 해석」을 썼다. 1918년 뤄자룬(羅家倫)과 함께 신조사(新潮社)를 조직하여 잡지 『신조』(新潮)를 발간했고 학생 주도자로 1919년 5·4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말 유럽으로 유학을 가 영국 에든버러 대학과 런던 대학에서 실험심리학·물리학·화학·고등수학 등을 연구하고 1923년 베를린 대학 철학원에서 비교언어학을 전공하였으며, 1926년 중산대학(中山大學) 초빙으로 귀국하여 국문과와 사학과 주임 교수로 부임하였다.
생몰연대·약력 미상
상해 출생. 일명 장랴오쯔(張꼼子)라고 함. 북경대학 법정학과에서 수학하다 1918년 『신청년』 필진과 희곡 문제로 논쟁하여 유명해졌다. 1919년 차이위안페이·천두슈 등에 대한 유언비어 유포에 린수와 함께 연루되어 퇴학 조치되었으며, 이후 경극 평론가로 활동했다. 저서로 『경극발전약사』(京劇發展略史, 上海大公報, 1951), 『가무춘추』(歌舞春秋, 上海廣益書局, 1951) 등이 있다.
절강 출생. 교육자이자 학자이다. 1904년 일본으로 유학 가 동맹회에 가입하고 1905년 일본의 유학생 규정에 반발하여 귀국한 뒤 상해에 중국공학을 설립했다. 1916년 미국에 유학하여 워싱턴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전공. 귀국 후 광화(光華)대학, 중앙대학, 상해 시 교육국, 국민정부 대학원과 교육부 등에서 주로 교육행정에 종사했다.
호는 수융(叔永). 중국 근대과학의 기초를 세운 저명한 화학자이자 교육자이다. 후스와는 상해 중국공학 동창. 1908년 일본으로 유학 가 동맹회에 가입하고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귀국하여 쑨원 임시 총통부 비서를 지냈다. 위안스카이가 복벽을 시도하자 1913년 미국에 유학하여 코넬 대학, 컬럼비아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1914년 동학들과 잡지『과학』 발간, 이듬해 ‘중국과학사’(中國科學社) 정식 발족에 참여했다. 1918년 귀국하여 사천대학 총장, 교육부 전문교육사(專門敎育司) 사장(司長)을 역임했다.
호는 메이순(梅蓀). 5·4신문학운동을 지지하였으며, 1924~27년에 북경교통대학 총장을 지냈다.
본명은 리위안(立袁), 호는 난제(南傑), 예명은 롄성(蓮笙) 등을 사용하였다. 20세기 초 중국의 저명한 극작가이자 영화 예술인이며 중국 근대화극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07년 춘류사(春柳社)에 참가하여 『엉클 톰스 캐빈』(黑奴?天錄) 등에서 배역을 맡았다. 1910년 귀국한 뒤 ‘신극동지회’(新劇同志會), ‘춘류극장’(春柳劇場), ‘민명사’(民鳴社) 등의 신극단에서 활동했고, 1915년 경극개량에 종사하였다. 1918년 다시 극장을 결성하여 연극 인재를 양성했으며, 1922년 희곡협사에 참가해 극본을 직접 창작했다.
원명은 쿠이서우(ª壽), 루쉰의 동생이며, 중국 현대의 저명한 작가이자 평론가이다. 1906년 일본으로 유학 가 1911년 귀국한 뒤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18년 북경대학 문과 교수로 부임했다. 1919년 후스·첸쉬안퉁과 함께 국어통일주비회(國語統一籌備會) 회원으로 활동했다. 『신청년』의 동인이며 정전둬(鄭振鐸), 선옌빙(沈雁빙) 등과 더불어 ‘문학연구회’(文學를究會)를 발기했다. 루쉰·린위탕(林語堂) 등과 『어사』(語絲)를 발간하여 주편을 맡기도 하였다.
생몰연대 미상
차쥐유(査巨猷), 차쥐허우(査鉅侯)라고도 함. 북경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민국시기에 『절강성 해녕현 가요』(浙江省海寧縣歌謠)를 편찬하기도 했다. 무협소설 작가 진융(金庸, 즉 차량융査良鏞)이 그의 조카이다.
생몰연대 미상
본문에 실린 서신 말미에서 북경고등사범학교 국문부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생몰연대·약력 미상
본명은 위밍헝(兪銘衡). 5·4시기 신시를 실험한 작가이자 문학연구회(文學를究會)의 주요 회원. 출판된 시집으로 『겨울밤』(冬夜, 1922), 『서쪽으로 돌아가다』(西還, 1924), 『기억』(憶, 1925) 등이 있다.
자가 시뤄(熙若), 호는 윈(耘). 중국의 정치학자로 동맹회에 가입하였고, 신해혁명 후 미국으로 유학 가 1920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 1925년 귀국 후 국민정부 교육부 국제출판물 교환국 국장, 고등교육처 처장, 국민참정회 참정원, 중앙대학·청화대학 등에서 교수를 역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중앙인민정부 위원, 교육부 부장 등을 역임했다.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에 후스로부터 영어를 배운 바 있어 후스와 절친한 사이로 알려졌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함께 수학하던 진웨린(金岳霖)의 회고에 따르면, 5·4운동 전야(바로 본문의 서신을 쓴 시기)에 국내에 있던 후스가 부쳐준 『신청년』과 『신조』(新潮), 『매주평론』(每週評論) 등을 동시에 받아보고, 이러한 미성숙한 유신파 의론들이 보수파보다 위험하다고 비판하며 신문화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했다고 전해진다.
자는 티셴(?先). 중국 근현대시기 사학자. 190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장타이옌으로부터 음운학(音韻學)을 배웠다. 1909년 귀국 후 교사생활을 시작해 1913년 북경대학 교수로 부임하였고, 그해 교육부에 국어 주음자모 방안을 제시했다. 1918년 북경대학 중문과 주임에 이어 사학과 주임 역임, 1920년 교육부에 신식 표점 시행을 요구했으며, 1921년 문학연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본명은 유유(有猷), 호가 궁잔(公展). 상해의 성 요한 대학에서 외국어과 전공. 재학 중 시사신보와 국민일보에 글을 투고했다. 5·4운동 당시 학생대표로 학생연합회 활동에 참가했고, 1919년 졸업 후 상해중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2년 상해에서 『신보』(晨報)를 발간하고 사장으로 부임했으며, 『신보』(申報)의 이사장도 겸직했다.
역자 김수연金秀姸은 고려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친 후, 베이징사범대학(北京師範大學)에서 중국현당대문학 전공으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중 전환기 소설의 근대적 자아』(공저)『중국근대지식연표』(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공자 길들이기』『후흑열전』『중국의 충격』(공역) 등이 있다. 그 외 중국현대문학 · 근대매체 · 문화 분야에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