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를 받는 동안 ‘장기’ 환자, 다시 말해 현 조건에서 ‘완치’ 가능성은 없을 듯한 질환을 안고 사는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내가 너무나 무력하고 취약하다는 느낌이 뼈저리게 와 닿았다.… 내가 나랏돈과 의료진의 노고가 깃든 치료를 받을 자격 없는 ‘쓰레기’로 보이고 싶지 않다면 ‘내보여야만’ 하는 나의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몸이 쇠약해지는 와중에도 꿋꿋이 버티는 사람, 의사들의 권고를 진심으로 따르길 원하는 사람, 지적으로 항상 믿을 만하고 여전히 사회에 ‘쓸모’가 있을 만한 사람이라는 이미지.… 나는 다음번 ‘검사’ 때에는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은 구두를 신어야겠다, 코나 귀에 삐죽 튀어나온 털을 정리하고 와야겠다, 알 아라비아타 토마토소스가 묻은 바지는 입지 말아야겠다, 따위의 생각을 하곤 했다. --- p.28
나는 중병 환자가 의료진과 주위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연출에 쏟아붓는 노력에서 『천일야화』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른바 ‘고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페르시아 왕 샤리아르의 사악한 계획을 저지하려는 셰에라자드처럼 매일매일 무모한 술책을 새로 지어내야만 하는 것 같다고.… 셰에라자드는 매일 저녁 재미난 이야기로 왕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로 이야기의 결말을 밝히지 않는다. 그래야만 왕이 적어도 이야기의 끝을 들을 때까지는 그녀를 살려 두고 싶어질 테니까.… 셰에라자드처럼 의료진들과 척지는 일 없이 유예를 끌고 나가기, 내가 내 병의 성격을 제대로 아는 거라면 이것이 앞으로 내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이다. --- pp.34-35
회복탄력성은 ‘긍정’심리학을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심리학은 볼테르가 조롱했던 라이프니츠의 사상과도 비슷하게, 아둔하리만치 낙관적인 면이 있다. 지난한 실패와 고초로 점철된 삶을 위태위태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눈에는 그런 면이 같잖아 보일 법하다.
긍정심리학은 사유의 패배주의자들에게 죄의식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절망을 극복할 힘이나 의욕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유죄다.
우리의 실존적 질문들에 고통효용론이 주는 대답들이 그렇듯, ‘긍정’심리학은 피폐한 삶을 사는 환자들에게 여전히 자행되는 사회적 가혹 행위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더없이 고약한 질병들을 긍정적으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는 이 심리학을 참기가 힘들다. 질병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며 우리 자신과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력을 기르는 ‘도전 과제’라느니, 질병이 우리의 진가(우리의 ‘용기,’ 우리의 ‘회복탄력성’ 등)를 드러낼 수도 있는 중요한 시험이라느니 하는 개수작 말이다. --- pp.46-47
환자는 “그가 영위하던 활동을 박탈당하면서부터 질병을 ‘파괴적인’ 것으로 경험한다. 여기에는 타자들과의 관계 파괴, 다양한 기존 역할과 능력의 상실이 수반된다. 그는 사회적 편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자기 정체성을 회복할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안간힘을 다해 그 같은 상황과 맞서 싸우고, 필요하다면 병의 존재마저 부정할 것이다. 반면, 자신의 개인성을 억누르던 사회적 역할을 회피할 가능성이 질병으로 인해 생긴다면 질병을 오히려 ‘해방’처럼 여길 수도 있다. 이런 의미일 때 질병은 파멸의 연속을 나타내기는커녕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 준다. 사회적 차원에는 존재하지 않는 삶의 의미 말이다. 병은 어떤 계시의 가능성, 나아가 자기 초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중증 질환을 경험한 일부 사람들에게는 병이 일종의 ‘직업’이다. 이들의 경우에는 병이 자기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병마와 싸움으로써 자기 역할을 인정받고 사회적 정체성을 보존한다. 투병은 그들의 삶에서 핵심 요소, 어엿한 직업 활동, 조금 특수하긴 하지만 확고한 사회적 편입 기반에 상응한다.”
그렇지만 부자든 빈자든 건강과 질병에 대한 생각에는 어느 정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보는 편이 현실에 더 가깝지 싶다. 어쨌거나 부자와 빈자가 완전히 분리된 사회적 풍토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니까. 그들이 어떤 기준, ‘가치,’ 실존적 불안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터무니없다. --- pp.75-76
고통효용론은 인간의 ‘본성,’ ‘본질,’ ‘조건,’ ‘운명,’ ‘근원적 불완전성,’ 그 밖에도 얼핏 그럴싸하게 들리는 별의별 일반성을 이유로 들어 인간이 필연적으로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펼친다.
고통효용론은 이 주장을 근거로 가장 약한 자, 가장 의존적인 자, 가장 빈곤한 자, 가장 심각한 병을 앓거나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자를 숙명론으로 인도한다. 다시 말해, 사회 안에서 빚어진 가혹한 운명조차도 그 사람 팔자려니, 그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몫이려니 믿고 살아가라는 얘기다!
고통효용론에 따르면, 질병과 그에 따르는 고통에서 ‘인식론적 장점’과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우수성’이 나올 수 있다.
고통효용론이 질병에 주목하면서 바닥에 깔고 들어가는 이 주장이 내가 보기에는 하등 근거가 없다.… 고통을 겪어 보았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인종주의, 여성 혐오, 혹은 그 밖의 모든 불쾌한 편견들을 품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고통이나 현재의 고통이 반드시 인식론적 장점이나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우수성을 안겨 주지는 않는다. --- pp.98-99
질병을 ‘일탈’의 한 형태로 취급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랍다. 일탈은 그 정의상 일반적인 규범에서 벗어남을 뜻하므로 그런 경우가 수적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질병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반적인 조건 아닌가. 더욱이 작금의 고령화 사회에서 만성 질환은 그 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대다수가 겪을 수 있는 부침을 ‘일탈’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병을 앓는 것보다 언제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일탈’이라고 부르기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 p.127
‘만성 질환’, 다시 말해 3~6개월이 지나도 낫지 않는 병이 사실상 어떤 의미인가를 내 체험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의학은 현 상태에서도 이미 광대한 지식의 보고이지만 나에게 삶을 연장해 주는 것 이상은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내가 치료를 받지 않을 경우 통계적으로 예측되는 사망 시기를 뒤로 미루어 주는
것이 현 의학의 최선이다.
비록 비공식적이지만 점점 공식적인 성격을 더해 가는 의료 지침이 있다. 환자의 남은 삶을 ‘양적으로’ 최대화하기 위해 지식, 치료, 금전을 투입할 때에는 반드시 삶의 일정한 ‘질’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지침이 그것이다.
하지만 ‘삶의 질’이라는 개념에 뚜렷한 내용을 부여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이 비공식적인 지침은 원칙상의 이유에서 반박에 부딪힐 수 있다. --- p.175
환자의 연약함이라는 새로운 윤리가 발달했다. 이 윤리는 환자의 타인들에 대한 의존 상태, 신체적 쇠약, 병에 걸렸을 때 더욱 악화되는 자연스러운 정서적?인지적 한계를 강조한다.
새로운 윤리는 환자의 자율성이라는 원칙을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듯 보인다. 이로써 자율성의 도덕적 가치와 실제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재고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윤리 개념에 회의적이다. 새로운 고통효용론이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윤리는 고통, 연약함, 의존성에 ‘인간 조건’의 구성 요소라는 위상을 부여하고 개인의 자유와 자기 결정이라는 이상들을 환상 수준으로 깎아내린다.
그뿐 아니라, 의료나 의학적 연구 결과에 대한 접근의 불평등, 다시 말해 건강과 관련한 ‘사회 정의’의 문제는 현재 의학철학의 중심 과제가 되고 있다. --- p.200
거창한 실존적 정당화 없이 신체적 고통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은 폭력적인 추락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묘사는 이 인정사정없는 추락을 더없이 강렬하게 환기한다.
병들고 나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산다는 것을 깨닫게 마련이다. 우리 사이를 심연으로 떼어 놓는 존재, 우리를 모르고 우리를 이해시킬 수도 없는 존재, 그것은 우리의 육체다. 길에서 아무리 무서운 강도를 만나더라도 우리의 불운에 동정하게 만들 수는 없을망정, 강도 자신의 이해관계를 타일러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에게 동정을 구함은 낙지 앞에서 설교하기다. 낙지에게 우리의 말이 물소리만큼의 뜻이 있을까. 우리가 이 낙지 같은 육체와 평생을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칠 것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일련의 은유들을 일종의 철학적 입장 취하기로 이해할 수 있다. 독창적이고 심원한, 육체와 정신의 이원론의 한 형태를 지지하는 ‘모럴리스트적인’ 입장이라고 할까.
육체는 단지 정신과 구분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육체와 정신은 서로 분리된 두 실체로서 그 속성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을 철학적 테제(육체와 정신의 ‘모럴리스트’ 이원론)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육체적 고통이 아무 의미 없는 날것 그대로의 사태라는 직관이 시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본다. 육체적 고통은 원인을 따져 설명할 수 있을 뿐, 이유를 들어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라는 직관 말이다.
--- pp.205-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