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__ 중세전기문학 | . 중세전기문학
나라의 기반이 튼튼해진 삼국의 후기 시대는 한자를 중국에서 받아들여 문명권 전체가 공동문어로 문학과 문화 활동을 하는 시기로서 중세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고대의 정복 중심 사회와 달리 공동문어문화를 매개로 문명권이 교류한다는 점에서 중세보편주의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원시와 고대 서사시문학의 주된 담당층이자 절대 권력을 가졌던 무(巫)나 왕 중심에서 귀족으로 문학 담당층이 더 넓어진 점은 한자라는 공동문어로 형성된 문명권의 변화에 기인한다. 중세전기문학 1기는 삼국시대 후기로, 중세전기문학2기는 고려 전기로 잡을 수 있다. 왕조의 변화가 문학 담당층과 문학사의 변화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특히 고려시대 과거제로 문인층의 저변이 넓어진 점이 고려 전기를 중세전기문학2기로 분류할 수 있는 특징이 된다.
4.1. 중세전기문학 1기: 삼국시대 후기 및 남북국시대
1. 고구려, 신라는 나라가 확장될 때 비를 세워 중세적 이념을 나타내고 국가의 권위를 세우려 했다.
2. 발해의 묘지(墓誌)를 통해 격식적 한문학의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3. 최치원을 통해 육두품 문인의 가능성과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전 시기부터 한자가 도입되어 부분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지만 본격적으로 한문을 수련한 집단이 생겨나 활동한 것은 이 시기에 처음 나타난 특징이라고 하겠다. 한문학을 통해 외교적으로 중국과 교류하고 전달 범위에 한계는 있겠지만 통치의 대상인 백성들에게 위엄을 갖춰 중요 사항을 전할 때 사용했다. 비문(碑文)이 그러한 예라고 하겠는데 땅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통치지역을 잘 다스린다고 하고 중요 인물의 일생을 한문학의 규범을 잘 갖춰 짓기도 했다.
한문학을 이용해 시를 짓기도 했지만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신라에서 권력을 독점한 진골은 한문학을 열심히 익히지 않았고 과거 제도를 통해 관리를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문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한문학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주장을 하기보다 주어진 업무 수행을 위해 한문학이 많이 이용되었다. 그 외에 불교를 이해하고 전파하기 위해 승려들의 한문학 활동이 있었는데 원효(元曉, 617~686), 의상(義湘, 625~702)이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원효가 대중과 어울릴 때에는 민요를 불렀을 텐데 자신의 불교 저술은 한문학을 이용했으니 양층언어현상이 한 사람을 통해서도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1.1. 한문학
삼국시대에 중세문학 시기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이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414)이다.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볼 수 있는데 고구려 건국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세계(世系)를 보이는 것이 첫 부분이고, 광개토대왕의 정복 및 통치에 대한 것이 두 번째 부분이고, 광개토대왕릉 관리에 관한 내용이 세 번째 부분이다. 중간의 한 부분을 들어본다.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은택은 하늘에까지 적시고, 위무는 사해에 떨쳐 입혔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그 업을 편안히 여겼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많아지고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네.
광개토대왕이 많은 지역을 정복하여 복속시켰다고 하면서 그 지역을 어떻게 관리했는지에 대한 표현이 보인다. 정복의 결과 백성이 더 편안해지고,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고 하고 싸워 이긴 것이 자랑스럽다고 강조하지는 않았다. 정복을 자랑스러워하면 반대로 지배당하는 지역에서는 힘을 키워 복수해야 한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을 힘이 아니라 덕으로 다스려 행복하게 잘 살게 한다는 내용을 공동문어인 한문으로 썼다는 점에서 고대와 다른 중세보편주의를 읽을 수 있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는 장수왕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제대로 판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정확한 연대 및 주요 내용에도 이설이 있다. 비문에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 원하여 동으로 왔다고 하고,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하고 있다. 백제, 왜 등의 문제로 신라가 고구려에 도움을 청한 것 같다. 신라는 동등한 관계로 형제국 지위를 지키며 도움을 청한 것 같은데 고구려는 조공 관계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형제 관계라면 서로 돕는 관계이어야지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는 관계는 아닐 것이다. 이두가 부분적으로 사용된 점이 「광개토대왕릉비」와 다르다.
신라는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대에 팽창하면서 비문을 남겼다. 540~550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줄여서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는 비의 아랫부분만 남아 있는데, 주로 공을 세운 사람들에 대한 포상의 내용이다.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561), 줄여서 「창녕비」(昌寧碑)는 마멸된 부분이 많아 확실하지는 않은데, 진흥왕 자신을 과인(寡人)으로 표현한 것 외에 특별히 중세보편주의적 표현이 등장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磨雲嶺新羅眞興王巡守碑), 줄여서 「마운령비」(磨雲嶺碑)는 신라의 팽창을 보여주는 비문이라고 하겠다. 태창(太昌) 원년이라고 하니 568년이다. 비문에 짐(朕)이라고 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府自惟忖, 撫育新古黎庶, 猶謂道化不周, 恩施未有. 於是歲次戊子秋八月, 巡狩管境, 訪採民心, 以欲勞賚.
스스로 헤아리건대 새 백성과 옛 백성을 어루만져 길렀으나, 오히려 이르길 교화가 두루하지 않고 은혜 베풂이 아직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무자년 추팔월에 관할하는 경내를 순수하여 민심을 살펴 위로하려고 한다.
순수(巡狩)의 목적이 설명되어 있다. 정복한 지역까지 포함해서 잘 보살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하다고 해서 돌아보고 민심을 살펴 위로한다고 하였다. 영토 확장 자체를 자랑스럽다고 하지 않고 잘 보살피고 관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백성을 살피고 위해야 한다는 중세보편주의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568년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黃草嶺新羅眞興王巡守碑),줄여서「황초령비」(黃草嶺碑)는 「마운령비」와 내용이 상당히 유사하다. 같은 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줄여서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는 마멸이 심해서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데 판독되는 일부 구절은 「마운령비」와 상당히 유사하다.
발해(渤海)의 비문 자료로는 「정혜공주묘비」(貞惠公主墓碑)를 들 수 있다. 정혜공주(737~777)의 사망 이후 780년 제작되었고 1949년 발견되었다. 변려문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중국 고전을 여럿 거론하고 고사에 보이는 공주, 부인을 거론하여 공주의 덕과 부인의 덕을 고루 갖춘 훌륭한 인물로 화려하게 서술했다. 발해의 높은 한문학 수준을 보여준다. 1980년 정혜공주의 동생인 「정효공주묘비」(貞孝公主墓碑)가 발견되었다. 정효공주(757~792)가 사망한 792년에 묘비가 제작되었는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정혜공주의 비문 내용과 거의 일치해서 기본 틀을 만들어놓고 재사용하지 않았나 의심하게 만든다.
고구려 한시로 『해동역사』에 가장 먼저 실려 있는 작품은 작자 미상의 「인삼찬」(人蔘讚)이다. 한 줄이 네 글자, 총 네 줄의 시경체로 구성되어 있어서(“三?五葉 세 줄기 다섯 잎에/ 背陽向陰 양지를 등지고 음지를 향하네/ 欲來求我 나를 찾고자 오려고 한다면 / ?樹相尋 가수나무에서 서로 찾으리라”) 당시 불리던 노래와의 관련성도 짐작할 수 있다.
다음 작품은 『해동역사』,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수록된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이다. 『대동시선』에 정법사는 후주(後周)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고구려와 시기가 겹치는 후주는 북주(北周, 557~581)로 보인다. 우뚝 솟은 돌과 사방 넓게 통하는 호수가 대비될 뿐만 아니라 붉고 흰 색채 대비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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