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에는 나와 정치적 의견이 같은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나’의 자기중심성을 심문하고 나를 윤리적으로 드높이며 나의 커뮤니케이션 감도를 개선해주는 교화적인 ‘타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동포에는 우리에게 그 어떤 ‘좋은 것’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사건건 우리의 생활을 방해하는 ‘불쾌한 이웃들’도 포함되어 있다.
‘불쾌한 이웃들’. 그것이 오르테가가 ‘약한 적’이라는 말을 빌려 나타낸 구체적인 의미다.
그런 ‘불쾌한 이웃들’과 공생하고 그 이익을 배려하며 그 권리를 옹호하는 것, 그것이 ‘시민’의 조건이라고 오르테가는 말한다.
교양이란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지만 ‘실체’가 없는 것이다.
교양을 정보나 기술처럼 정량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교양은 지식의 ‘양’과 관계있지만, 관계가 있을 뿐 지식의 ‘양’ 그 자체는 아니다.
‘교양’의 깊이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려 할 때 얼마나 ‘큰 지도책’을 상상할 수 있는지에 따라 계측된다.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은 ‘그 책을 읽지 않으면 그 책을 읽은 녀석에게 속을 위험이 있는’ 책을 찾아내는 데 있었다. 나는 딱히 남보다 영리해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속는 게 싫었을 뿐이다.
나의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가끔 상당히 험악한 말투의 글이 올라올 때가 있다. ‘고약한 사람이군’ 하고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 거친 욕설이 있어도 그 글을 지우지 않는 것이 내 방침이다.
왜냐하면 ‘삭제’한다는 것은 그 글이 내 홈페이지의 ‘문맥’에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글이 나의 약점을 호되게 공격해서 내가 ‘상처를 받았고’, 하지만 ‘효과적인 반론이 생각나지 않아서’, 홧김에 ‘언론을 억압했다’는 ‘멋대로의 해석’을 이 ‘작성자’에게 허용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예의를 모르는 자에게 그러한 ‘의미의 선물’을 갖다 바칠 정도로 아량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정치적 상황에서 ‘나’를 고정적으로 설정하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줄어든다. 그러므로 정치적 인간은 시스템에 가장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나’를 되도록 고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이덴티티의 유지보다 시스템의 유지가 자신에게도 ‘모두’에게도 우선순위가 더 높기 때문이다. 아이덴티티란 시스템의 ‘사후 효과’일 뿐이다. 그 점을 아는 것이 정치적 인간이자 넓은 의미에서의 ‘어른’이다.
그만 입을 잘못 놀려서 친구를 잃은 사람은 마음속으로는 상대를 원래 ‘친구’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술을 마시고 이성을 잃은 사람은 ‘마시면 이성을 잃는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알고서 취한 것이다. ‘마가 끼어서’ 선을 밟고 넘어버린 사람은 ‘밟고 넘어가고 싶었기’ 때문에 ‘밟고 넘어간’ 것이지 누가 그러라고 강제한 게 아니다. 잠재적 욕망을 본인의 동의하에 겉으로 드러냈을 뿐이다.
나는 그런 것은 ‘후회’라 부르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을 오랜 세월에 걸쳐 산酸처럼 침식하여 우리를 폐인으로 몰아가는 종류의 ‘후회’는 ‘무언가를 하지 않은 후회’다.
둘도 없는 시간, 둘도 없는 사람, 둘도 없는 만남을 ‘놓친’ 것에 대한 후회, ‘일어나지 않은 사건’에 대한 후회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을 끝없이 계속 도발한다.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는 후회’는 문맥 의존적이어서 인생의 한 구간에 일단 마침표가 찍혔을 때만 ‘후회’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반면 ‘무언가를 저질러버렸다는 후회’는 그 일을 저질러버린 직후에(경우에 따라서는 하고 있는 와중에) ‘아, 이건 위험한데’라고 뼈저리게 느낀다.
즉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후회’로서 뿌리를 내리며, 그 ‘후회’ 자체가 인격의 일부를 이룬다. 반면 ‘해버린 일에 대한 후회’는 ‘되도록 빨리 잊는 편이 좋은’ 종류의 후회이며, 대체로 우리는 ‘사건’과 ‘후회’를 한데 합쳐서 즉시 잊어버린다.
어떤 ‘후회’가 보다 독성이 강한지는 생각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재능’에는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아무리 시간을 할애하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전혀 괴롭지 않고, 또 그것에 종사하는 시간이 속속들이 발견과 환희로 차오르는 활동. 자신에게 그 활동이 무엇인지를 알고 주저 없이 그것을 선택하는 이를 우리는 ‘재능 있는 사람’이라 부른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만큼의 쾌락을 얻고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애초에 자신이 쾌락을 얻고 있는지조차 불확실하니 어쩔 수 없다. 자기만의 ‘쾌락의 척도’가 없는 사람이 ‘쾌락’과 ‘욕망의 충족’을 구별할 수 있을 리 없다.
비슷한 단어지만 ‘쾌락’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것이고 ‘욕망’은 본질적으로 모방적인 것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원할 때, 대부분의 경우 그 이유는 ‘그것을 다른 사람이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에 감염된다.
욕망은 모방적이므로 애초에 그 기원은 나의 내부에 없다. 그러므로 욕망이 충족되었다 해서 ‘나의 내부’에 만족감이 골고루 퍼지지도 않는다. 모방 욕망의 충족이란 욕망의 대상이 전경에서 후경으로 물러나 의식하지 않게 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모두 ‘그건 이제 탐나지 않아’라고 말하기 위해서만 욕망된다.
덧붙여 말하자면 경험적으로 볼 때 직업 선택이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일’ ‘하기 싫은 일’을 소거해나간 끝에 ‘남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곁에서 보기에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좋아하는 일’이 명확한 사람이 아니라 ‘싫어하는 일’ ‘못하는 일’이 명확한 사람이다.
사람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보다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더욱 당당해진다. 그때야말로 자신에 대해 말할 정밀한 어휘를 얻을 기회다.
그러므로 “촌스러워”라든지 “구려”라든지 “지겨워”라는 단순한 어휘로 자신의 혐오를 말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애초에 자신의 ‘개성’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어 개성을 실현하는 일은 100퍼센트 일어날 수 없다.
자립이란 “좋아, 오늘부터 나는 자립한 인간이 될 거야!”라고 선언함으로써 이루는 것이 아니다.
‘자립한 사람’이란 주위에서 ‘자립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 그러므로 남들이 신뢰하고 무언가에 대해 상담을 요청하며 충고를 바라고 조력을 청하고 책임을 요구하는 이다. ‘자립한 사람’의 판단은 심사숙고 끝에 나온 것이므로 거의 언제나 적절하며, 또 일단 결단을 내린 사항에 대해서는 쉽사리 저지하거나 개입하지 못할 정도의 실력적 기초가 뒷받침되어 있다.
자립이란 홑원소물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립은 여러 사람이 뒤얽힌 관계 속에서 복수의 사람들이 연루된 이해관계가 복잡한 사건을 거친 뒤, ‘아, 그 사람은 「자립한 사람」이었구나’라는 외부의 평가를 거쳐서만 검지된다.
자립은 선언이나 각오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착실한 노력을 통해 획득되고 쌓이는 ‘사회적 신용’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외국에서 유학하는 학생이 많다. 그러나 2년이나 3년 정도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멍하게 지낸 정도로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나 지식’에는 부가가치가 거의 없다.
이 점은 대학이나 전문학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장소든 거기서 얻는 사회적 자원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의 밀도와 거기에 쏟아부은 노력의 대가다. 멍하게 보낸 시간에는 누구도 ‘가격표’를 붙여주지 않는다.
‘비판은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것은 집단의 완전한 멤버가 취할 수 없는 태도다. 최종적으로 한 사회를 살기 편하게 만드는 사람은 그 사회가 ‘살기 불편하다’고 언성을 높여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회가 ‘살기 불편하다’고 비판받을 때 ‘몹시 부끄러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