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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3

십자군 이야기 3

[ 완결편 ]
리뷰 총점8.8 리뷰 50건 | 판매지수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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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5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600쪽 | 800g | 163*224*35mm
ISBN13 9788954615228
ISBN10 8954615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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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감수 : 차용구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파사우대학교에서 서양 중세사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인문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로마제국 사라지고 마르탱 게르 귀향하다』『중세 유럽 여성의 발견』이, 옮긴 책으로 『중세의 빛과 그림자』가 있고 「중세 문화 속의 그리스 신화」「필립 아리에스의 죽음관에 대한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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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세 살이 된 살라딘은 이튿날인 9월 7일을 결전의 날로 정했다. 리처드도 적군의 움직임을 보고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살라딘이 결전을 청한다면 바로 다음 날일 것이 분명했다.
서른네 살의 리처드는 이를 염두에 두고 전략을 세워, 그날 밤 장수 전원을 모아놓고 명했다.

하나, 적이 공격해와도 격퇴하면서 행군을 속행한다.
둘, 단 내일은 임전태세를 갖추고 행군한다.

(…)
그날 행군 진형의 특징은 대대 규모의 부대로 나눈 뒤 이를 어느 한 사람이 이끄는 형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신 리처드는 1백 명 전후의 기사로 구성된 다수의 중대를 만들었다.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행동의 자유를 더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을 격퇴하면서 행군을 속행한다고 했지만, 전투를 염두에 둔 이 진형은 방어보다 공격 진형에 가까웠다.
게다가 이들 중대는 리처드 자신처럼 이름 있는 무장들이 이끌었다. 평소라면 적어도 대대 지휘를 맡을 만한 이들에게 중대 지휘를 맡긴 것이다. 몇 배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적의 대군에 맞서려면, 1천 명 전후의 병사로 구성된 대대보다, 병력은 10분의 1밖에 안 되어도 더 많은 수의 중대로 각기 전력을 다해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살라딘은 1천 명 정도가 아니라 1만 명 규모의 군대를, 그것도 여럿 투입했다. 그 살라딘군은 숲속을 지나 리처드의 군대를 향해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희한하게도 살라딘은 원래 숲의 초입에 두었던 본진의 위치를 숲이 끝나는 반대쪽 지점으로 옮겼다. 아코 공방전 때도 살라딘은 전선에서 훨씬 떨어진 후방에 본진을 두었으니, 전선 근처에 본진을 둔 것은 ‘하틴 전투’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살라딘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육지 쪽 세 방향을 포위하고 그 포위망을 좁혀가며 적을 괴멸시키는 작전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한 방향은 바다이므로 세 방향에서 동시에 몰아붙이면 도망칠 수 없다.
살라딘이 이때 투입한 병력은 4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한편 리처드의 군대는 2만 명도 채 안 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살라딘군은 병력의 절반밖에 쓰지 못했다.
실제 전장에서 이슬람군은 살라딘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처음에는 그렇게 움직였지만 어느 단계에서부터 불가능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리처드가 살라딘이 예상한 대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191년 9월 7일, ‘아르수프 전투’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이 전투는, 해가 중천에 뜬 오전 9시에 이슬람측에서 울리는 북소리로 시작되었다.

먼저 살라딘이 늘 쓰는 전법대로 궁병들이 일제히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댔다.
튼튼한 갑옷과 투구, 방패로 무장한 그리스도교측 장병들에게 이를 막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날 이슬람의 궁병들은 전진하면서 화살 비를 퍼붓기를 집요하게 반복했다. 이어서 보병부대의 뒤에서 천천히 다가온 기병부대가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일제히 말에 채찍을 가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보병부대를 통과하고는 둘로 갈라져, 행군하는 리처드군의 전위와 후위를 공격했다.

이때 두 이슬람 기병부대의 속도는, 살라딘의 의도였는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교군의 후위를 공격하러 간 쪽이 더 빨랐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군 중 제일 먼저 적의 공격에 노출된 것은 가장 후미에서 행군하던 병원 기사단이었다. 게다가 전력질주에 따른 힘을 그대로 받았으므로 공격의 강도도 가장 강력했다.
(…)
이를 본 리처드는 곧바로 전술을 변경했다.
뛰어난 무장은 미리 생각한 전술대로 상황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적당한 파도가 다가오면 주저하지 않고 올라탈 줄 안다.
자기 중대를 이끌고 격전이 벌어지는 후위로 달려간 리처드는 선두에 서서 적진 깊숙이 쳐들어갔다. 그러자 리처드가 움직인 것을 안 다른 장수들도 각 중대를 이끌고 뒤를 따랐다. 이리하여 행군의 후위는 가장 심한 전투의 장이 되었다.

어디 출신이고 어느 부대 소속인지는 더이상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그만이다. 이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적을 쓰러뜨리겠다는 생각뿐. 이런 마음은 리처드든 일개 병졸이든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의 대세는 일찌감치 그날 이른 오후에 결정되었다.

먼저 도망치기 시작한 것은 살라딘군이었다. 전장을 가득 메운 단말마의 비명과, 순식간에 늘어가는 아군 사망자, 끊이지 않고 울리는 이슬람군의 북소리마저 고무보다 애도의 소리로 들렸다.
그때까지 용감하게 싸우던 이슬람군의 병사뿐만 아니라 그들을 이끌던 태수들까지 도망치기 시작했다. 특히 베두인 기병은 공격해오던 속도만큼이나 도망치는 것도 빨랐다. 기병 보병 할 것 없이 모두 숲속으로 도망쳤다. 숲만 빠져나가면 그 바깥에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1만 명의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추격으로 전환한 휘하 병사들이 숲속으로까지 쳐들어가려는 것을 본 리처드는, 절대 숲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우선 숲속에서의 전투는 기병에 불리한 접근전이 될 게 분명하고, 게다가 도주의 희망을 잃은 적병을 상대하면 쓸데없는 희생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살라딘 정도 되는 무장이 전장에 전군을 투입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반드시 대기 병력이 있을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숲 건너편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행군을 재개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되도록 빠른 시간 내에 안전한 숙영지에 들어가는 것이 기세를 몰아 추격하는 것보다 우선이었다.
이리하여 살라딘의 마지막 계획마저 허사로 돌아갔다.
---pp.128~135
역사에 대한 글을 쓰면서 통감하는 것 중 하나는, 정보란 그 중요성을 인식한 자에게만 올바로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십자군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이 점에 대해선 그리스도교도든 이슬람교도든 예외가 아니었다. 같은 그리스도교도 중에도 정보에 정통한 교황이나, 왕, 제후가 있었던 반면 그 방면에 어두웠던 교황이나 왕, 제후도 있었다. 같은 그리스도교도이자 이탈리아의 교역상인이면서도, 베네치아인은 정보를 중요시했던 반면 제노바인은 그렇지 않았다.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렇게 말했다. “현실의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보이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
보고 싶지 않은 현실도 직시해야만 정보를 활용할 수 있다.

바그다드의 칼리프와 그 주변의 이맘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지배하는 술탄 알 아슈라프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십자군을 이끌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교황에게 파문을 당한 황제가 조만간 유럽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카이로를 직격할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게다가 이듬해 봄에는 몰타 출신의 해군장수가 이끄는 20척의 배도 팔레스티나로 돌아올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있던 이는 알 카밀뿐이었다.

나블루스로 찾아온 사자의 요청에 응해, 술탄과 황제의 교섭이 재개된 것은 1228년 가을이었다. 첫 교섭은 아코 교외에 있는 황제의 막사에서 이루어졌다. 현실 정치에 투철해야 할 외교 교섭이지만, 알 카밀이 보낸 젊은 태수 파라딘과 프리드리히는 동년배일뿐더러 둘 사이에는 통역도 필요하지 않았다. 시종 친밀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체스판을 사이에 둔 ‘교섭’이 진행되었다.
(…)
9월에 시작된 교섭은 11월에 접어들자 장소를 옮겼다.
동생 알 아슈라프와의 문제가 타결되어 더는 나블루스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알 카밀이 카이로로 돌아가는 길에 가자에 들렀기 때문이다. 가자에는 술탄의 별궁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프리드리히는, ‘성지’에 있는 그리스도교 세력의 수도격이며, 따라서 어엿한 왕궁도 있던 아코를 떠난다. 야파로 이동한 것이다. 진정한 교섭 상대와의 거리를 절반 이상 단축한 셈이다.

야파, 즉 텔아비브는 현재 이스라엘의 수도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이스라엘 제일의 도시다. 한편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가자는 팔레스티나 사람들의 자치지구이자, 파타하보다 과격한 하마스가 지배하는 ‘가자 지구’의 중심적인 곳이다. 가자 역시 정치 기능이 집중된 도시라 할 수 있다.
텔아비브에서 가자까지의 거리는 불과 17킬로미터 안팎이다. 21세기인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는 이 거리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미사일을 쏘아대고 다른 한쪽은 공중폭격으로 대응하며 대치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장소에서, 지금으로부터 8백 년쯤 전인 1228년에서 1229년 사이는,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 공생을 실현하기 위한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도 그리스도교 세계 속계의 일인자인 황제와 이슬람 세계 속계의 일인자인 술탄, 즉 정상 중의 정상들이.
(…)
어쨌거나 알 카밀이 시간 벌기로 시작한 교섭은 이렇게 조금씩 진지하게 이교도간의 공생관계 수립을 지향하는 교섭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그사이에도 프리드리히는 중근동 그리스도교 세력의 안전을 보장할 수단을 강화해가고 있었다.

이때부터 팔레스티나 지방에 튜턴 기사단이 관할하는 성채가 세워지기 시작한다. 그전까지 이 지방에 있던 성채들은 대부분 병원 기사단이나 템플 기사단이 세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튜턴 기사단이 건설한 성채도 추가된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적극적인 원조가 없었다면, 창설된 지 10년 남짓한 튜턴 기사단이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프리드리히가 튜턴 기사단만 특별 취급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기사단이 소유한 성채라도 전략상 중요하다고 판단되면 보강공사를 원조했다. 또한 병원 기사단 단장과 자주 의견을 나누었는데, 항구도시 방어의 핵심에 속하는 성채 역시 전략상 중요하다고 판단되면 성채 운영에 오랜 경험을 가진 병원 기사단에 일임했다.

평화를 위한 교섭을 계속하는 한편 방어력의 강화를 잊지 않은 것인데, 이런 공사는 이끌고 온 병사들을 활용하는 동시에, 중근동의 그리스도교도 사이에 뿌리 깊게 남아 있던 강경파의 시선을 교섭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는 효과도 있었다. 강경파의 눈에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왔으면서도 교섭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부정적으로 비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야파와 가자에서 양측이 강화를 위한 교섭을 시작한 것은 1228년 11월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쳀 지난 1229년 2월, 드디어 교섭이 타결되었다. 그동안 끈기 있게 교섭을 진행해온 프리드리히가 이긴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내용이었다.
2월 18일 아침, 먼저 야파에서 프리드리히가 조약서에 서명하고 날인했고, 그날 밤 가자에서 알 카밀이 서명과 날인을 마쳤다. 두 사람은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나지 않고서 강화를 성립시킨 것이다.
---pp.380~387
예상대로 이슬람군은 아코를 둘러싼 성벽 중 가장 수비가 탄탄했던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의 담당구역을 피하고, 비교적 수비가 약한 ‘성 안토니오 탑’에서 ‘저주받은 탑’을 거쳐 ‘대주교 탑’에 이르는 동쪽 성벽으로 대거 침입했다.
이 적군의 침입로에 해당한 튜턴 기사단 본부는 순식간에 적의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러나 튜턴 기사단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버틴 덕에, 황제 프리드리히에게서 하사받은 광대한 본부 건물만은 지킬 수 있었다.
(…)
템플 기사단의 단장 기욤 드 보죄도 중상을 입어 꼼짝 못하게 된 이들 중 하나였다. ‘티루스의 템플 기사단 기사’는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적이 던진 창 하나가 우리 단장을 관통했다. 왼팔을 들어올리는 참에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창에 찔린 것이다. 단장은 그날 방패를 들고 있지 않았다. 칼은 너무 많은 적병을 베어 무뎌지고 부러져 더는 쓸 수가 없어 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오른손에 든 지휘봉이 전부였다. 적병이 던진 창은 겨드랑이 아래 흉갑과 팔을 보호하는 무구의 틈새를 직격해서, 반대쪽으로 손바닥 길이가 넘게 꿰뚫고 나왔다.
그가 평소에 창이나 화살을 간단히 관통할 만한 무구를 착용했던 건 아니었다. ‘저주받은 탑’이 위태롭다는 말을 듣고 서두르는 바람에 주변에 있던 가벼운 갑옷과 투구만 걸치고 달려나왔던 것이다.”

심각한 부상이라는 건 누가 봐도 분명했다. 중상을 입은 템플 기사단 단장 기욤 드 보죄는 피가 철철 흐르는 와중에도 정신은 또렷했으나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런 그를, 옆에서 함께 싸워온 병원 기사단의 부단장 마티외 드 클레르몽이 주위에 있던 템플 기사단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아코 성내에 있는 건물로 옮겼다.
그러나 그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기욤 드 보죄는 마티외 드 클레르몽에게 안긴 채 숨을 거두었다. 마흔한 살에 맞이한 죽음이었다.
전우의 시신을 조용히 땅에 눕힌 마티외 드 클레르몽은, 그의 동료인 병원 기사단 기사들이 도피해 있는 기사단 본부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이미 항구 근처까지 밀어닥친 적진으로 뛰어들어갔다.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이 이슬람을 상대하는 전투집단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1118년부터 이 아코 공방전까지 173년 동안, 두 기사단은 함께 협력해 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두 기사단 모두 성지 수호를 기치로 내세운 십자군의 상설 군사력이었다. 단원 수는 적어도 개개인의 전투능력이 뛰어난 특수부대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라이벌 의식도 강했다.
또한 당시 유럽에 많았던 ‘떠돌이’ 기사, 즉 주군이 없는 자도 가입할 수 있었던 템플 기사단과, 왕이나 봉건영주의 가계와 연관이 있는 이른바 귀족 출신만 단원으로 받아들였던 병원 기사단은, 단원의 일상생활부터 조직의 구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투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달랐다.
게다가 템플 기사단의 단원이 대부분 프랑스 태생인 데 비해, 병원 기사단의 단원은 유럽 각지에서 모였다는 차이점도 있었다.

십자군의 역사를 통틀어 주역을 맡아온 이 두 종교 기사단의 기사들이 소속의 경계를 넘어 함께 싸운 것은 이 아코 공방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템플 기사단 단장과 병원 기사단 부단장이 마치 등을 맞대고 싸우듯 함께 분투한다.
중상을 입고 쓰러진 템플 기사단 단장을 병원 기사단 부단장이, 아직 적이 침입하지 않은 건물로 옮긴다.
그리고 병원 기사단 부단장의 품에 안긴 채, 템플 기사단의 단장이 숨을 거둔다.
전우의 죽음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병원 기사단 부단장은 자신의 위치를 내버리는 행동을 한다. 그가 속한 기사단의 단장이 중상을 입고 키프로스로 탈출했으므로, 이제 아코에 남은 단원들을 이끄는 임무는 그에게 있었다. 그런데도 동료들이 피해 있는 본부로 향하지 않고, 밀려드는 적들 속으로 뛰어들어가 장렬한 죽음을 맞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런 그의 뒷모습이, 지금까지 현장을 증언한 템플 기사단의 젊은 기사에 의해 후세에 전해진다.
이러한 일은 173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때 아코에서가 처음이었다.
---pp.52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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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시대가 공유하는 신념이 역사 위에 펼쳐놓는 광기는 장관이다.
그 광기를 들추어내는 시오노 나나미의 문장은 서늘하다.
김훈(소설가)
『십자군 이야기』는 역사책이 아니다. 때문에 단순히 과거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재이자 미래를 이야기하는 책, 나도 모르게 그 과거와 현재, 미래에 들어와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김주하(앵커)
역사는 지속된다. 과거는 남는다. 과거는 돌아온다. 십자군 이야기의 종결편인 이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20세기 후반 이후 이어진 중동 사태, 동유럽과 서유럽의 대립, 중국의 위협의 시발점들이다. 오늘의 세계 정세를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작업은 십자군 역사의 과거에서 시작해야 한다.
윤혜준(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무거운 역사책과 어두운 박물관에서 잠자던 십자군과 이슬람 전사들을 세상에 끌어낸 이야기의 그물망은 마법이다. 8백 년 잠에서 깨어난 전사들이 다시 칼과 창을 들었다. 급박한 박자에 맞춰 얽히고설킨 전쟁의 곡선으로 전진하고 후퇴하는 장면을 숨 쉴 틈도 없이 따라가게 만드는 저 이야기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민경현(고려대 사학과 교수)
천 년 전의 전쟁에서 오늘을 본다. 『십자군 이야기』의 무대는 지금도 여전히 세계의 뇌관인 곳이다. 이 책은 이념 전쟁이라는 과거와 현재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중한 교훈을 제시한다.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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