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피나와 검은 망토
아빠 말고도 석수와 목수 등 근처 산간 지역에 사는 기술자 수백 명이 애쉬빌에 모여들어 빌트모어 대저택을 짓는 일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때도 아빠는 기계를 보수하는 일을 맡았다고 했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고 지하실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때도 아빠와 세라피나는 여기 남았다. 거대한 배의 엔진실에 숨어든 밀항자처럼 두 사람은 지하실에 남아, 난방 파이프와 공구 틈바구니에서 숨어 살았다. 사실 아빠와 세라피나에게는 돌아갈 곳도, 기다리는 가족도 없었다. 세라피나가 엄마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아빠는 묵묵부답이었다. 아빠에게는 세라피나가 전부였고 세라피나에게는 아빠가 전부였다. 세라피나가 기억하는 한 처음부터 여기 지하실이 두 사람의 집이었다. --- p.23~24
아빠는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세라피나는 자신의 외모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세라피나의 작고 마른 몸에는 군살이라곤 하나 없었고 근육과 뼈와 힘줄이 대부분이었다. 세라피나는 변변한 드레스도 한 벌 없었다. 아빠의 낡은 작업 셔츠 위에 작업실 구석에서 굴러다니던 노끈을 허리띠처럼 졸라매어 입고 다녔다. 아빠는 세라피나에게 옷을 사 주지 않았다. 여자아이 옷을 사러 나갔다가 괜히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참견받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남의 간섭이라면 질색인 사람이었다. --- p.29
검은 망토를 입은 남자는 소녀를 집어삼킨 뒤 잠시 격렬한 발작을 일으켰다. 섬뜩한 빛과 음산한 안개가 남자의 주위를 둘러쌌다. 시체 썩는 듯한 끔찍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세라피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콧잔등에 잔뜩 힘을 주고 입을 꾹 다물었다. 바로 그때 검은 망토를 입은 남자가 휙 몸을 돌려 세라피나를 보았다. 세라피나가 숨을 참느라 공기를 들이마실 때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낸 모양이었다. 거대한 발톱이 심장을 움켜쥔 듯한 느낌이 온몸을 엄습했다. 망토 자락이 남자의 얼굴을 덮고 있었지만 세라피나는 섬뜩한 빛이 감도는 그 두 눈을 똑똑히 보았다.
세라피나는 극심한 공포에 질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검은 망토를 입은 남자가 세라피나를 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난 널 해치지 않아.” --- p.38
그때 검은 정장을 입은 키 큰 신사 한 명이 다가왔다. 문득 여기 모인 신사들 가운데 검은 망토를 입은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남자는 분명 유령 같은 존재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어둠 속에서 눈만 기괴하게 빛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라피나가 검은 망토를 물었을 때 분명 입안에서는 피 맛이 났다. 또 하나, 검은 망토는 세라피나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어둠 속에서 랜턴을 들고 다녔다. 그 말은 곧 유령 같은 존재이지만 동시에 보통 사람이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세라피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남자들만 훑어보기 시작했다. 검은 망토가 지금 여기 있지는 않을까? --- p.56
세라피나는 가만히 서서 한참 동안 생각했다. 왜 자신만 살아남고 다른 아이들은 살아남지 못했을까? 세라피나는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나는 선한 존재일까 악한 존재일까? 세라피나는 어둠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하지만 나는 어느 편이지? 나는 어둠의 편일까 빛의 편일까? --- p.291
세라피나와 뒤틀린 지팡이
새들이 날아간 방향을 한번 보았다가 고개를 돌려 새들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의 꼭대기를 멀리 응시한 채 세라피나는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마침내 상황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새들은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난 것이 아니었다.
새들은 달아나고 있던 것이었다.
세라피나는 숨을 길게, 깊이 들이마시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정체 모를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지금. --- p.22
세라피나에게 사냥은 곧 본능이었다. 세라피나는 왜 자신만 척추가 길고 휘어져 있는지, 왜 쇄골이 다른 뼈와 분리되어 있는지, 왜 발가락이 네 개씩 여덟 개밖에 없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 세라피나는 왜 자신은 어둠 속에서도 사물이 잘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지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러다가 마침내 엄마를 만났을 때 세라피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엄마는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야생 산고양이였던 것이다. 세라피나는 평범한 인간 소녀가 아니였다. 새끼 동물이기도 했다. --- p.56
하인의 손을 물었을 때 그 감각이 아직도 이빨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 나올 때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어쩌면 레이디 로웨나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세라피나는 정말로 끔찍한 야생 동물일지도 몰랐다. 문명 세계는 세라피나가 있을 곳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엄마는 숲속도 세라피나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이 아직도 마음속에서 메아리쳤다. 세라피나는 맹수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인간에 가까웠다. 너무 느렸고 너무 약했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세라피나.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숲도, 빌트모어도 세라피나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세라피나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 p.138
그러나 이미 늦었다. 남자가 손바닥을 들어 올려 입술에 대고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죽음의 숨결이 온몸을 관통했다. 세라피나의 몸이 차갑게 식었다. 근육이 마비되었다. 세라피나가 땅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세라피나 뒤에 있던 브레이든도 쓰러졌다.
호흡을 빼앗기고 심장이 멈추었다. 세라피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얼굴 반쪽을 흙 속에 묻은 채 시체처럼 엎어져 있었다. 브레이든도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뻣뻣하게 굳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몸이 굳는 순간 공포로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그 상태 그대로 세라피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라피나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나무 사이로 저벅저벅 다가온 수염 난 남자의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 p.348
세라피나와 조각난 심장
세라피나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나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만 가득했다.
내가 장님이 된 건가? 세라피나는 혼란스러웠다.
빌트모어의 미로 같은 지하실에서 복도 구석구석에 숨은 쥐를 사냥할 때처럼 어둠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저택 어딘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도, 멀리 떨어진 방에서 하인들이 일하는 소리도, 바로 옆 간이침대에서 들려오는 아빠의 코 고는 소리도, 기계가 내는 웅웅 소리도, 시곗바늘이 째깍거리는 소리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차가움과 고요함이었다. 여기는 빌트모어가 아니었다. --- p.10
그런데 그 괴생명체가 휙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세라피나는 헉하고 숨을 삼켰다. 끔찍한 상처가 얼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처럼 곪아 터진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인지 악마인지 아니면 그 둘을 섞어 놓은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는 존재가 손을 앞으로 덜렁덜렁 뻗은 채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눈으로 숲속을 훑었다. 날카롭고 뾰족한 이가 부딪칠 때마다 딱딱 소리가 났다. --- p.37
괴기스러운 생명체가 입을 벌렸다. 그러자 낮은 쇳소리가 진동하듯 흘러나왔다. 그리고 세라피나는 똑똑히 보았다. 폐에서 새하얀 공기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단순한 날숨이나 비명이 아니었다. 폭풍이었다. 세라피나를 둘러싼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뭇잎이 회오리처럼 날아올랐다. 나뭇가지가 삐걱거리며 휘어졌다. 소용돌이치던 공기가 비바람으로 변했다. 정체 모를 괴생명체의 입에서 나오는 끔찍한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럴수록 폭풍우도 점점 더 거세졌다. --- p.38
옷은 브레이든의 손안에서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방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금속 상자 안에 그토록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옷은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바로 그때 온몸으로 쏟아지는 비를 맞던 브레이든의 뒤로 번개가 번쩍 내리꽂혔다. 브레이든이 옷을 어깨에 두르며 천천히 일어섰다. 브레이든이 검은 망토를 입었다. --- p.108
세라피나는 마법사를 마주쳤던 그 강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으로도 창자가 배배 꼬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라피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이제 거의 남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아빠는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를 두려워할 때 나온다고 했다. 두려워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진정한 용기라고 말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로 돌아가려면 용기를 내야 했다.
--- p.128~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