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나 바오로는 자신의 생각을 이리저리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그에 비해 예수는 처해진 상황에 따라 순간순간 하느님의 존재를 알려주는 데 최고의 능력을 보여준다. 그분이 하느님을 가르쳐주는 방식의 가장 친밀한 경우는 제자들과 수시로 나누었던 대화에서 발견된다. 어느 날인가 제자들은 예수 앞에 나와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을 걱정했다. 예수 한 분만 믿고 출가했건만 거지 떼 신세를 면치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한심해서, 또는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이라도 한 번 더 베풀면 허기나 면할까 해서 특별 부탁을 했을 것이다. “스승님, 배고파 죽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반문한다. “새들이 언제 농사를 지어 곡식을 곳간에 저장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혹은 “들꽃이 사람들 몰래 스스로 주변의 잡풀도 뽑고 몸치장을 하거나 옷을 지어 입는 것을 눈으로 본 적이 있느냐” 그런데도 온갖 부귀를 누린 솔로몬 왕의 옷도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한낱 들꽃의 아름다움에 비길 바 못되고, 또한 새들이 굶어 죽었다는 말도 일찍이 들어본 적 없으니 괜한 걱정일랑 말라는 충고이다(마태 6,25-34 참조)._간디와 바오로와 예수 중에서
예수의 신념은 죄인들과 나눈 식사자리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마르코복음 2장 15-17절을 보면 예수가 죄인의 집에서 식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때를 놓칠세라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예수에게 시비를 건다. (…) 율법의 음식 규정에는 깨끗한 음식과 그렇지 않은 음식의 목록이 있다(레위 11장). 예컨대 돼지는 굽은 갈라졌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아 피하고, 낙지와 문어는 비늘이 없어 꺼린다. 피에는 생명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 멀리하고 목 졸라 죽인 짐승은 숨을 막았기에 꺼림칙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의인들의 경우고 산 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으려면 돼지라도 잡아먹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요원한 규정이었다. 그들은 아무것(?)이나 먹느라 절로 죄인이 되었고 그들 집에서 식사를 하면 이 또한 자동적으로 죄인이 되는 일이었다. 예수의 처신을 두고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시비를 걸 만했다. 하지만 예수의 생각은 달랐다. 예수는 자신이 죄인을 구하러 이 세상에 왔다고 한다. 예수의 관심은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죄인 집에서 나누는 식사는 그들 역시 하느님의 자녀로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예수를 죄인들 모두 불러 모아 의인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가진 인물로 해석하면 큰 잘못이다. 오히려 하느님은 죄인 그 자체로서 사랑하신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하느님에겐 의인/죄인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역시 사람이 중요하다. 음식은 없다, 사람만 있을 뿐이다._깨끗한 것과 깨끗하지 않은 것 중에서
바오로는 율법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깊이깊이 깨달았다. 일단 법 앞에 서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소용없다. 그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 역사적인 차원에서 율법을 이해하려 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서 무려 430년이 지나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졌음을 환기시킨다(갈라 3,18-19). 율법이 경제와 사회와 종교를 옥죄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율법은 인간 스스로의 나약함을 깨닫게 만드는 역할을 해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육체의 욕망에 노예로 살아가는 바오로 자신이 바로 율법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같은 의미에서 율법은 모세 이후 천 년 이상 인간의 감시자 역할을 톡톡히 해온 셈이었다. 예수가 등장해 상황을 완전히 바꿔놓기 전까지 말이다. 예수의 율법 폐지 선언이 바오로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 1세기 교회에서 최고의 파란을 일으킨 사람은 바오로다. 미적미적하면서 유다교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확실하게 선을 그은 사람이라서 그렇다. 바오로는 율법을 전공한 사람답게 율법 안에 내포된 약점을 파악해냈고, 이를 극복하는 길을 예수에게 배웠다. 비록 살아생전 예수를 만난 적은 없지만 1세기 교회의 어떤 제자들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잘 이해했다. 바오로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율법에 따라 공동체 소속의 징표로 할례를 받고 피 냄새 진동하는 동물 제사를 바치고 있었을지 모른다. 율법이여, 우리에게서 영원히 안녕!_율법의 끝 중에서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분으로서, 예수에게 실제로 차별이란 없었다. 율법에서 정한 의인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분이다. 예수에게는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도 없어 시리아 페니키아 이방 여인의 딸을 고쳐주었다(마르 7,24-29). 비단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외에도 예수가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에서도 본 적이 없다’라고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은 로마인 백인대장(루카 7,1-10 참조)이나, 예수가 숨을 거두는 현장에서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라고 고백한 백인대장(마르 15,39 참조)도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예수에게 남녀의 차별이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예수는 여성에게도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주었고(루카 10,38-42 참조), 공동체의 살림을 남성들과 나누어 맡겼으며(루카 8,1-3 참조), 여성 역시 떳떳한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주었다(참조: 마르 16,1-8 마태 28,9-10 요한 20,14-18). 여성도 남성에 비해 한 치의 손색이 없는 제자였던 것이다. 평등사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예수와 함께 하는 식탁에서였다. 복음서에 보면 추종자들이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셔 식사를 대접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예수는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아들여 식사를 나눈 적도 있었지만(루카 11,37-54 14,1.12 참조), 세리의 초대에도 선선히 응했다(마르 2,15-17 참조). 어디 그뿐인가. 로마에 빌붙어 유다인을 수탈하는 악명 높은 세관장 자캐오의 초대마저 예수는 받아들였다(루카 19,1-10 참조). (…) 예수의 입장은 확고했다.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마르 2,17). 그리스도인 모두는 동등한 형제자매이며 섬길 분이라곤 오직 아버지 하느님과 스승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계층이 존재해서 안 된다는 말씀이 그렇게 표현되었고 이는 평등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발언이다._예수의 파격적 가르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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