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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사

중국 근대사

: 왕조에서 사회주의로, 중국의 체제격변기 1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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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2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364쪽 | 484g | 148*210*30mm
ISBN13 9791188990283
ISBN10 1188990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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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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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시대 군기대신들 가운데 만주인, 몽골 팔기, 한군 팔기, 한인 등의 점유율을 산출해보면, 군기처를 누가 주도했는지 명확해진다. 건륭 시대 동안 군기처에서 한인의 비율이 높았던 때는 60년 중 6년뿐인데, 넓게 보아 몽골 팔기를 만주인으로 포함할 경우 단 3년만 한인이 군기처에서 간신히 과반을 넘었다.
만주인 군기대신이 항상 과반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정책 결정에서 만주인의 이익과 의사가 관철되는 구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륭 시대에 진행되었던 대외 원정이 실제로 그다지 큰 경제적 이익이 없었음에도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황제의 위신을 높이려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었는데, 대외 원정이라는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사안이 내부의 반대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군기처의 인적 구성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군기처의 만주인 대 한인 비율을 통해 만한병용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육부가 상층에서 결정된 정책을 집행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청나라가 내세운 만한병용의 실제 모습은 핵심 정책 결정 기구를 통해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에서 건륭 시대까지 만한병용은 사실 한인들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수사였고, 만주인은 사실상 모든 중요한 정책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청나라 특색의 왕조 체제」중에서

청영아편전쟁의 패배로 만주인들이 세운 청나라 중심의 천하에 흠집이 생겼고, 청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중심에 놓고 외부 세계를 바라보던 질서에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분명히 청영아편전쟁은 이미 만들어진 청나라의 천하가 더 큰 세계 질서 속에서 변화되는 전환점으로서 의미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청나라 사람에게 전혀 다른 세계가 등장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미 형성된 청나라의 천하가 변화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질서는 사람들의 발에 맞는 신발과 같았다. 사람들은 신고 있는 신발이 해져서 더는 신을 수 없게 되었거나, 어떤 신발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한동안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새 신발을 사게 마련이다.
청나라가 외세와 대적하기 위해 강력한 화력을 가진 대포를 비롯한 무기를 도입하거나 군대를 개혁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기 도입과 군대 개혁은 팔기 제도라는 청나라의 근간에 대한 변혁을 의미했고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는 문제였다. 가경 시대 이후 청나라의 재정은 좋지 않아서 황제들도 근검을 외치고 있었다. 전후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급하고 전쟁으로 재정이 더 어려워진 상황에서 군사 개혁 문제는 현안으로 대두되지도 않았다.하지만 외부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움직임도 있었다. ---「제국의 충돌」중에서

자희태후를 중심으로 한 청나라 조정은 열강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의화단의 과격한 행위를 묵인했고, 상황을 오판했으며, 왕조의 위기를 자초했다. 신축조약 이후에는 신정을 통해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하지만 신정은 지방의 중앙에 대한 신뢰와 지지보다는 불신과 이반을 더욱 부추겼다. 지방의 총독과 순무는 중앙의 무리한 요구에 불만을 가졌고, 향신들은 중앙 조정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청나라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고 다소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한편 이미 청일전쟁 패배 이후부터 청나라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새로운 혁명을 시도했던 세력들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혁명의 여정」중에서

1915년 8월, 입헌군주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안회가 출범했다. 주안회는 중국에 민주공화정을 실시하기 위한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고, 일본도 입헌군주제를 통해 강대국이 되었다고 선전했다. 주안회를 비롯한 여러 관변 단체들은 입법원에 황제 중심의 통치 체제를 부활시켜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고, 제제운동을 전개했다. 그 단체들은 황제가 부활하지 않으면 백성들을 구할 수도 중국을 지킬 수도 없다고 주장하며 세 차례에 걸쳐 청원서를 제출했다. 10월이 되자, 청원 단체들을 중심으로 국민대표대회가 구성되었다. 12월에는 국민대표대회의 국민대표 1993명이 입헌군주제 실시에 찬반을 묻는 투표를 실시했다. 투표 결과, 단 한 표의 반대도 없이 만장일치로 입헌군주제 안건이 통과되었다.
한편 베이징에서 왕조 체제를 부활시키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위안스카이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조직되고 있었다. 국민당은 제2혁명이 실패한 뒤에 와해되었고, 쑨원이 도쿄에서 중화혁명당을 결성했다. 쑨원은 민주공화제를 강령으로 하여 위안스카이 토벌 계획을 세웠고, 중국 안에도 중화혁명당의 지부들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 중화혁명당의 위안스카이 토벌은 황제의 부활이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면서 활기를 띠었다.
1916년 1월 1일, 위안스카이는 황제 즉위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고 중화제국을 선포했다. 그는 중화민국 초기의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강력한 황제가 다시 등장하여 질서를 잡아주기를 바란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위안스카이가 황제에 즉위하기 전에 이미 전국에서 황제의 부활을 반대하며 민주공화정의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전국적인 항의에도 위안스카이가 미동도 하지 않자, 제3혁명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1915년 12월, 차이어는 윈난성에서 호국군을 조직하고 성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 뒤를 이어 구이저우성이 독립을 선언했고, 이듬해에도 광시성을 시작으로 독립을 선언하는 곳들이 늘어났으며, 독립을 선언하지 않은 성의 도독들도 위안스카이에게 황제 제도의 철회를 요구했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3월에 다시 중화제국을 폐지하고 중화민국을 회복했다. 그렇지만 1916년 5월까지 열 개 성이 중앙으로부터 독립했고,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전국에서 사퇴 요구가 계속되었고, 6월 여름 더위가 시작되자 위안스카이는 실의 속에서 요독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민국의 혼돈」중에서

형식적으로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협력에는 세 축이 있었다. 쑨원, 코민테른(소련), 중국공산당원들이 그것이다. 쑨원은 국민당에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광둥에서 쫓겨난 뒤에 정치에서 완전히 잊힐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코민테른은 세계의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하는 혁명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제국주의의 포위로부터 자국을 지켜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중국공산당원은 1922년 현재 195명에 불과한 상태였고 당을 지켜내고 당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코민테른의 지원이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협력은 쑨원과 코민테른이 주도했고, 공산당원들의 생각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양당의 협력에 대한 국민당 내부의 반대는 쑨원의 권위에 의해, 공산당 내부의 반대는 코민테른의 압박에 의해 무마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당의 협력에서 쑨원이 가진 역할과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는데, 이 점은 역설적으로 양당의 협력에서 취약한 고리가 될 수도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창당했고 공산당원들은 세력이 약한 상황에서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랐지만, 내부의 반발이 잠복된 상태였다. 한편 코민테른(소련)은 카라한 선언을 통해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마음을 얻었고, 나중에는 말을 바꿔서 러시아의 이권을 계속 보유했으며,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력과 연대하여 중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양당의 협력에 대해 국민당은 개조라고 여겼고, 중국공산당은 합작(제1차 국공합작)이라고 여겼다. 공산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식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국민당이 공산당을 흡수한 것이니 개조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듯하다. ---「국민당의 승리」중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도 중국공산당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농촌 지역은 전체 중국에서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중국공산당은 폭넓은 계층의 지지를 확보하려면 공산당 외의 정파나 계급의 도움이 필요했다. 해방구에서 적용된 3·3제의 원칙은 중국공산당이 처한 현실과 당시의 위상을 잘 보여주었다. 3·3제란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당, 민족주의 성향의 소자산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비공산당 계열의 좌파, 중산층과 신사층을 중심으로 하는 중간파 등이 해방구 권력 기구에서 각각 3분의 1의 자리를 분점하는 것이었다.
중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중국공산당은 옌안의 지도부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차츰 세력을 키워 나갔다. 1941년, 옌안에서는 정풍운동이 시작되었다. 정풍운동의 목표는 1937년 이후 혁명에 참여한 당원들을 사상적으로 무장시키고, 주관주의·종파주의·형식주의(당팔고) 등을 뿌리 뽑음으로써 옌안의 기풍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1937년에서 1941년 사이에 군대 규모가 40만 명, 당원은 80만 명으로 늘어난 상황이었으므로 새로 들어온 구성원들을 교육해야 한다고 여겼다. 새로운 구성원의 대다수는 중국 북부의 성들에서 온 농민이었고, 소수는 공산당이 이끄는 항일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열정을 지닌 학생과 지식인이었다. 중국공산당은 3·3제라는 형식의 통일전선전술을 통해 농촌 지역에서 영향력을 계속 확대했고,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하향식 지도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강력한 집단이 되었다. 농민들은 중국공산당이제시하는 희망에 찬 미래를 동경하게 되었다. 통일전선전술을 통한 지지층의 확대, 토지 개혁을 통한 경제 문제의 해결, 외부 침략자들로부터의 안전 보장 등이 점점 더 중국 북부와 중부 지역 농민들 사이에서 공산당의 존재감을 높여주었다. 1945년 봄에는 중국공산당의 통치 아래 있는 주민이 9500만 명이었고, 정예군이 100만 명에 달했다. 군인 수는 1937년보다 20배나 증가한 것이었고, 농민 병사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많았다.
1948년 봄, 중국공산당은 농촌혁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내전에서도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이때부터 농촌에서 생겨난 혁명의 열기를 도시로 확산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동북 지역에서 선양과 하얼빈이 중국공산당의 손에 들어오자, 당의 주도로 노동조합이 만들어졌고 노동자들이 조직되었다. 노동조합은 홍군이 점령하는 도시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어냈고,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게 되었으며, 중국공산당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다만 이때부터 중국의 노동조합은 노동자에 의해 조직되고 성장하는 독립적인 단체라기보다 당과 국가의 하위 기구로서 자리매김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독재와 혁명」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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