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바로 이 법문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첫째는 모든 대보살입니다. 화엄회상에서 십지十地 보살은 처음부터 끝까지 염불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범부 가운데 선근과 복덕이 두터운 사람이 이 법문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과거 생에 일찍이 무량무변의 일체 제불여래께 공양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법문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제불여래께서 반드시 가지加持하여 주십니다. 이런 사람은 몇 년 동안 수행을 한 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불보살께서 호지護持하여 주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일체 제불여래와 보살께서는 중생이 이 염불법문을 수학하도록 널리 권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이는 일승요의一乘了義 법문 중 하나이고, 또한 불법 중에서 가장 진실한 법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오승五乘을 설하신 것은 방편설이고, 사실은 오로지 일승의 불법만 있을 뿐입니다. (19p)
화엄법문이 비록 원만할지라도 마지막 십대원왕이 극락으로 돌아가도록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구경원만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화엄도 마지막에는 정토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선종은 비록 돈교頓敎에 속하나 칠일 만에 성취할 수는 없습니다. 유식종의 개산조사開山祖師인 규기대사窺基大師 조차도 말씀하시길, “정토법문은 원돈대법圓頓大法이자 불가사의한 미묘한 법문이다.” 하셨습니다. 정토삼경 가운데 『아미타경』과 『무량수경』에서는 염불을 제창하고 있습니다. 『관무량수경』에서 가르치는 방법에는 관상觀想 / 관상觀像 / 지명持名이 있지만, 그것도 지명염불을 마지막에 놓고 있습니다. 학불하는 동수 여러분께서 특히 주의할 점은, 불교 경전에서는 항상 가장 수승한 것이 맨 마지막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관무량수경』의 16관十六觀에서도 지명염불을 맨 마지막에 놓고 있습니다. (24p)
대세지보살의 염불법문은 진허공 / 변법계의 모든 일체 근기에 두루 계합될 수 있고,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법耳根圓通은 우리의 사바세계에 특히 적합합니다. 밀종의 의규儀規는 너무 번잡하고, 참선은 침상에 누우면 참구할 수 없지만, 염불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언제든지 균일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염불은 「염하여도 염함이 없을(念而無念)」 때까지 염하고, 「능소가 같이 사라질(能所雙亡)」 때까지 염하면, 곧 부처의 경계에 들어가 단번에 범부를 뛰어넘어 곧장 성인의 경지로 들어가니, 이는 체득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기타 법문은 인因을 닦고 과果를 얻음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오직 염불에서만 인과가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종淨宗을 「연종蓮宗」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식물은 먼저 꽃이 피고 나중에 열매를 맺지만, 연꽃은 특별하여 인과(因果: 연꽃과 연밥)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이로 인해 연꽃으로 정토종을 상징합니다. (25P)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길, “일체 법은 심상心想으로부터 생긴다.” 하셨습니다. 자신의 미세한 생각을 스스로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세계는 바로 심상으로부터 생긴 것입니다.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가 되고(心作),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이다(心是).” 이는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말로 바로 정토종 이론의 핵심입니다. 부처는 자기 진심眞心이고, 본래 부처이니, 지금 이 순간 부처를 염한다면 어찌 부처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번 소리 내어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바로 본사이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오탁악세에서 증득하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입니다.” 이 말은 우익대사?益大師께서 체득하신 것으로 우익대사 이전에는 이렇게 말한 이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 바로 부처가 되는 법입니다. 불법을 수학하는 목표는 바로 이 한 마디 말에 있습니다. 「삼보리三菩提」 는 「정각正覺」이고, 「삼먁삼보리三?三菩提」는 「정등정각正等正覺」이며, 「아뇩다라阿?多羅」는 「무상無上」입니다. 「정각」은 「아라한」이고, 「정등정각」은 「보살」이며, 「무상정등정각」은 「부처」입니다. (26p)
부처님께서 오탁악세에서 성불하신 방법이 바로 염불입니다. 염불하여 성불하는 법문은 제불여래께서 수행하신 경계로 오로지 석가모니부처님(唯佛)과 일체제불(與佛)만이 비로소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법문은 경전을 많이 볼 필요가 없고, 경전의 분량도 매우 적으며, 대보살님조차도 이해할 수 없고 대단히 믿기 어렵습니다. 우리들이 오늘날 믿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면, 이는 바로 제불께서 위신력으로 가지加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들으려 하여도 들을 수 없고, 말하려 하여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27p)
『관무량수경』에서 이르시길,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가 되고(是心作佛),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이다(是心是佛).” 하셨습니다. 능념能念의 마음이 바로 여래의 과각果覺이고, 바로 본래 성불成佛입니다. 이 마음으로 아미타불 명호를 집지하는 것이 바로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가 부처이고, 지금 또 부처가 되는 까닭에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부처에 즉卽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장 질러가고, 방편구경이며, 기특 수승하고 불가사의합니다. 이 단락을 이루는 문자의 의미는 지극히 깊고 광대합니다. 정종 수학이 근거하는 이론은 바로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가 되고(是心作佛),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이다(是心是佛)」 이 두 마디 경문에 있습니다. (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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