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은 인력의 법칙과는 반대로 작용해서, 질문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경험을 증폭시킨다. 호기심은 우리의 성장을 돕는다.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단테는 선, 혹은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선이라고 알고 있는 것, 혹은 우리에게 선이라고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봤다.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 무엇이 선인지 발견할 수 있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통해 그것이 유용한 것인지 혹은 위험한 것인지를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 pp.42~43
그때까지만 해도 인류는 걱정과 질병의 굴레를 지지 않고 살고 있었다. 걱정과 질병은 뚜껑이 잘 닫힌 상자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호기심이 든 판도라는 뚜껑을 열었고 그 결과 온갖 종류의 고통과 근심이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더불어 제우스가 혀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든 질병이 우리를 침묵 속에서 밤낮으로 괴롭히게 되었다. 자기가 벌인 일에 깜짝 놀란 판도라는 다시 뚜껑을 닫으려고 했지만 모든 고통은 이미 상자에서 빠져나간 후였고, 상자 바닥에는 오직 ‘희망’만 남아 있었다. 판도라의 이야기는 충동적 호기심에 내포된 모순의 개념을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어서 16세기 시인 조아심 뒤 벨레(Joachim du Bellay)는 판도라를 고대 로마에 비유했다. ‘영원한 도시’ 로마, 로마가 상징하는 모든 것, 로마의 모든 선과 로마의 모든 악이 모두 그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 p.67
병원에 누워서 관처럼 생긴 기계 안에 들어가 내 뇌를 스캔하도록 하면서, 나는 중세 신학자들은 신이 아닌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여겼던 호기심들을 갖는 것이 현대에는 가능해졌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을 관찰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표로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정신 활동을 하는 주체인 동시에 그것을 관찰하는 관객 입장이 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지 않은가. 영원히 같이 하도록 되어 있는 두 사람을 이별시킨 죄로 자신의 베인 목을 들고 다녀야 하는 벌을 받은 단테의 베르트랑 드 보른처럼 우리는 우리의 뇌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 p.169
《신곡》 전체는 숲으로부터의 탈출기이자 인간적 조건을 향한 순례의 여정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다. (중략) 숲을 떠난 후 모든 여정에서 단테가 혼자인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베르길리우스 혹은 베아트리체가 길잡이를 해주고, 벌을 받거나 구원을 받은 영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악마와 천사들의 말을 듣는 등, 단테는 다른 이들과 계속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대화를 통해 전진한다. 단테의 여정은 곧 그 여정에 대한 이야기와 동일하다. --- p.249
《신곡》은 증험론적 시인 동시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묘한 뉘앙스를 가졌고, 명백함과 암묵적인 함축성, 정통파 신학과 불온한 해석, 엄격한 위계질서와 평등한 우정이 모두 공존하는 작품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 작품의 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어휘는 라틴어나 프로방스어, 기존의 구어나 신어로 된 시, 오래된 논문이나 어린이의 주절거림, 과학 용어와 꿈을 묘사하는 언어 구분 없이 모두 차용했다. (중략) 호기심을 가진 독자는 이야기의 한 가닥을 따라간다고 믿을 때마다, 그 저변, 위, 양옆에서 여러 가닥의 이야기들을 발견하게 된다. --- p.316
우리는 자의식이 있는 동물이며, 우리가 질문을 하고, 호기심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문학이 증명해준다. 끊임없이 주고받는 과정에서 세상은 우리에게 수수께끼와 같은 증거들을 제공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이야기로 만들어서 의심할 줄 알도록 하는 감각과 불확실한 일관성을 세상에 부여하고, 거기서 더 많은 질문이 나오도록 한다. 세상은 우리가 세상을 감지할 수 있는 단서들을 주고, 우리는 그 단서들을 모아 진실보다 더 진실처럼 보이는 서술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내서, 현실에 대해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의 현실이 되도록 한다.
--- pp.459-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