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거짓을 말하는 자는 단지 거짓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거짓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며, 이런 경향으로 기울어 거짓말하기를 선택해서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여기서 플라톤에 대한 또 다른 반론, 즉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비자발적으로 거짓말하는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사람보다 더 나쁘다는 반론이 등장합니다. --- p.11
거짓이라도 자신이 말하는 것을 스스로 믿는다면, 그리고 남을 속이려는 의도 없이 그에게 이런 착오를 전한다면,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자기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의 진실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단순히 틀린 것을 말하는 것일 뿐,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뤄야 할 믿음과 진심의 문제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거짓에 관하여』)의 서두에서 환기합니다. 게다가 여기서 그는 믿음과 주장의 차이에 관해 말하는데, 이는 우리에게 오늘날에도 여전히, 또한 새롭게 중대한 가치가 있습니다. ‘거짓말한다’는 것은 심지어 참말을 하면서도 타인을 속이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말하지 않으면서 틀린 말을 할 수 있고, 속이려는 목적에서 다시 말해 거짓말을 하면서 맞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틀린 말이라도 우리가 말하는 것을 믿는다면, 즉 그 말에 믿음이 있다면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 p.15
루소는 (...) “누군가가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위조 화폐를 준다면, 그는 이 사람을 속이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하는 거짓말에 대한 정의가 올바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칸트는 누군가가 아무것도 훔치지 않더라도 상대를 속인다면 그는 거짓말한 것이라고 말할 겁니다. 칸트는 타인에게 말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항상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루소는 필요한 만큼이나 섬세하게 (거짓말의 개념적) 구분을 다양화하고 그의 ‘진실성’과 ‘올바름’, ‘공정함’의 공언(무喇)에서 ‘참과 거짓의 추상적 개념’보다 자기 ‘양심’의 ‘도덕적 지침’에 따라 살아왔음을 강조하고 나서 의외로 자신을 도덕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 p.19
누군가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누군가가 거짓말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구조적인 이유로 언제나 불가능합니다. ‘내가 말한 것은 참이 아니다. 분명히 내가 틀렸지만, 나는 속이려고 하지 않았다. 선의였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상대로 우리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 p.24
거짓말은 ‘의도적인 행위’, ‘거짓말하기’입니다. (‘정해진’) 거짓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하기’라고 부르는 발언, 그 말하기를 원하는 바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거짓말인가’라고 묻기보다는 ‘거짓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한다는 것인지, 무엇보다도 거짓말할 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 p.25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또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속이려는 분명한 의도, 욕망, 의지가 없다면 거짓말도 없다’고 했습니다. 진정성과 ‘말하는 것’, 말하는 행위의 영역에서 거짓말을 규정하는 기준이 되는 의도는 내용, ‘말해진’ 것의 진실성이나 거짓성과 별개입니다. 거짓말은 말해진 것이 아니라 말하기와 말하기-원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이라고 믿는 잘못된 주장을 말하면서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거짓으로 믿는 진실한 주장을 말하면서 거짓말한다. ‘의도를 기준으로’ 행동의 도덕성을 판단해야 한다.” --- p.27
“우리는 이제부터 비교적 최근 현상, 즉 역사 다시 쓰기와 이미지 생산, 여러 정부의 정책에서 명백히 드러난 사실과 여론의 광범위한 조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외교와 정치적 권한의 역사에서 너무나 잘 드러나는 정치의 전통적 거짓말은 일상적일 수도 있고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내용이라는 의미에서 진정한 비밀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어쨌거나 완료된 사실 수준의 신뢰성을 갖추지 못한 여러 의도에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 현대 정치에서 거짓말은 전혀 비밀이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 사람이 이미 아는 것들을 효율적으로 다룬다. 예전 방식의 초상과 달리 하나의 이미지는 실재를 보기 좋게 포장하는 게 아니라, 완전한 대체물을 내놓는다. 그리고 이 대체물은 현대 기술과 대중매체 덕분에 원본이라면 결코 그럴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많이 보인다.” --- p. 40
거짓말이나 진실성의 의무에 대한 칸트식 정의는 매우 형식적이고, 명령적이고, 무조건적이어서 모든 ‘역사적’ 고려를 배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진실만을 말해야 하고, 어떤 순간에 어떤 가정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역사적 상황이 어떻든 간에 참돼야만 합니다. 유용한 거짓말 혹은 배려를 위한 거짓말이나 친절한 거짓말 따위는 절대 용인되지 않습니다. 칸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분석한 난처하고 까다로운 사례들과 관련해서 정교한 타협론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대부분 성서에 등장하는 사례에서 출발해 진실성을 절대적 형식의 의무로 정의할 때, 모든 역사적 내용을 배제하는 것 같습니다. --- p.49
칸트는 인간의 법적 권리와 일반적 사회성의 근거 자체, 즉 기대되는 효과가 어떻든지, 외부 맥락과 역사 맥락이 어떻든지, 무엇보다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내재적 필연성에 관심을 둡니다. 조건 없이 거짓말을 몰아내지 않으면 인류의 사회적 관계를 그 원칙부터 무너뜨리고, 사회의 존립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칸트는 아주 작은 거짓말이라도 정당화된다면, 즉 윤리 실천 원칙이 스스로 법을 파괴하지 않고는 보편화될 수 없을 어떤 행동이 정당화된다면 사회는 존립이 불가능해진다고 보았습니다. --- p.51
제가 일본을 언급했으니, 단어를 하나하나 따져보고 또 그 실질적인 구조도 가늠해봐야 하는 2년 전의 선언을 통해 무라야마 총리가 어떤 변화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이라는 국가를 직접적인 책임자로 지목하지 않고, 제국적 정체성의 영속성에 천황을 연루시키지 않으면서 총리는 고해 형식으로 진실을 말했습니다. 그가 의미심장하게 천명한 것, “역사의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제가 이 담화를 처음 읽은 언어인 영어로 번역된 문장을 인용하자면 “these irrefutable facts of history”)과 “우리 역사에서 저질러진 실수error in our history”와 대면한 무라야마는 자기 이름으로 “깊고 진실한 사과heartfelt apology”)를 했습니다. 그는 회한의 고통을 고백함으로써 개인적 애도를 표함과 동시에 어렴풋이, 아주 막연하게 민족적·국가적 애도를 표했습니다. 국가 수장도 아니고 자국민도 아닌 사람들의 죽음에 국가가 슬픔을 표현할 때, 국가의 애도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 p. 58
아렌트는 단지 미디어의 발전뿐 아니라 우상의 대리물과 그 이미지,) 그리고 공적 공간의 지위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미디어의 구조도 고려합니다. 코이레의 글에서는 이런 주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대상의 재현물 역할을 그만두고 그 사물이나 대상을 파괴해서 대신하기 위해 스스로 그 대상 자체가 되고, 대상 자체로서 자료를 보존하는 유일한 아카이브이자 보존된 사건 자체가 되어 아이콘이 가상이 되게 하는 기술적 변환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p.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