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는 해 질 녘 나무들이 바람결에 내는 신음 소리가 마치 귀신의 노랫소리와도 같았다. 그리고 숲의 어느 구석도 다른 어떤 구석과 같지 않고, 그 어느 밤도 여느 밤과 같지 않아서 누구도 이곳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방금 지나간 전쟁에 대한 가장 원시적이고도 야만적인 전설들, 온몸을 부들부들 떨게 하는 허구적인 이야기들도 이 지역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아마도 산이 낳고 숲이 낳았을 것이다. --- p.18
전쟁이 끝나고 나서 지금까지 나는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이 기억에서 저 기억 속으로 떠다녀야 했다. 벌써 몇 년째인가?
멀쩡한 정신으로도 나는 사람들로 가득한 길 한가운데서 문득 길을 잃고 꿈속을 헤매기도 한다. 그런 날이 결코 적지 않다. 길가에 뒤섞인 악취가 갑자기 썩은 냄새로 변하고, 나는 1972년 섣달 끝 무렵의 어느 날로 돌아가 피비린내 나는 육박전 끝에 시신들이 즐비했던‘고기탕’언덕을 지나고 있다.
보도에서 풍겨 오는 죽음의 냄새가 너무 지독해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황급히 팔을 올려 코를 틀어막는다. 어느 날 밤에는 천장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기도 했다. 그 소리가 등골이 오싹한 무장 헬리콥터의 굉음처럼 들려왔던 것이다. --- p.66
그는 프엉을 잊으려 갖은 노력을 다 했다. 다만 한심한 것은 어찌해도 그녀를 잊을 수 없다는 것이었고, 더욱 가련한 것은 여전히 마음속으로 그녀를 갈망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이 모든 것이 곧 지나갈 것이며, 그의 나이 또래면 사랑마저도, 가슴속 슬픔마저도 세상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번민이나 고통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의미한 것인지, 공허한 인생 속으로 흩어지는 한 줄기 연기와 같다는 것을 또한 잘 알았다. --- p.94
항 꼬 역에서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었다. 거리는 매우 조용했다. 그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집 안은 컴컴했다. 아마도 모두 잠든 듯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날 밤 계단으로 올라가는 현관문의 빗장이 걸려 있지 않았다. 마치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반쯤 열려 있었다. 역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없다는 걸 끼엔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을까! 계단을 올라서는데, 누군가 숨죽이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에 갑작스레 가슴이 조여 왔다. 누르스름한 불빛 아래 복도가 흐릿하게 빛났다. 그와 아버지가 함께 살았던 집의 문은 옛날의 밤색 그대로였다.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동판도 원래 자리에 붙어 있었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두 손이 점점 떨려 와 끼엔은 몸을 제대로 가누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기쁨의 눈물이 뜨겁게 차올라 흘러내렸다. --- p.107
아마도 당대의 작가들 중에 끼엔처럼 무수한 죽음을 목격하고 수많은 시체를 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작품에는 송장이 넘쳐 났다. 수제 폭탄에 무너진 지하 참호에는 몸에 긁힌 자국 하나 없는 나이 어린 미군병사들이 굴비 두름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 머리를 어깨에 기대고는 긴 세월을 잠들어 있었다. 커 랭 밀림의 가장자리 낮은 풀숲 곳곳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호랑이무늬 복장의 낙하병들이 퉁퉁 부풀어 오른 채로 파리 떼와 구더기, 자신의 살이 썩는 냄새를 태연히 견디며 누워 있었다. 또한 끼엔의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B52 폭격기가 밤새 공중을 빙빙 돌고 난 다음 날 새벽 사 터이 강변 코끼리풀 들판으로 팔다리가 투두둑 떨어져 내리는 광경을 떠올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흘간의 혈전 후 시체들로 지붕을 인것 같은‘고기탕’언덕을 직접 눈으로 볼 수도 있다. 지뢰를 밟은 병사가 마치 날개라도 단 듯 나뭇가지 위로 튕겨져 오르는 모습을 보고는 섬칫 몸을 떨기도 했을 것이다.‘끼엔의’죽음은 다양했고, 매우 풍부한 형태와 색채를 띠었으며, 산 사람보다 더 생동감이 있었다. 그는 이제 땅속에 살지 않고, 꿈속에서 소리 높여 삶과 죽음에 대해, 죽음의 순간에 대해, 심지어는 죽음 이후의삶에대해우리에게들려주는병사와도같았다.
--- p.116~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