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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의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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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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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5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592쪽 | 626g | 128*188*35mm
ISBN13 9788963710433
ISBN10 8963710432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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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늦은 오후, 은소는 전망이 근사한 창가로 안내를 받고 있었다.
두꺼운 양탄자를 밟자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졌다. 가게 안은 금속 재질과 밝은 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자칫하면 너무 모던하게만 보일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군데군데 과하지 않게 적당히 배치된 식물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건축가로서 주위를 둘러본 은소는 누가 내부 설계를 했는지 꽤나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앳된 인상의 종업원이 다가왔다.
“일행이 오면 주문할게요.”
“알겠습니다.”
종업원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다른 테이블의 손님에게로 걸어갔다. 눈길이 의미 없이 그 뒷모습을 좇아갔다. 열심히 희망에 살고 열심히 꿈을 이루어 가는 건강한 사람의 열기를…….
시야가 멀리까지 미치는 맑은 날이었다. 서울 도심의 지평선을 따라 눈길을 움직이던 은소는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다소 방심했던 자신을 가다듬었다.
눈앞에 이혁이 서 있었다.
“많이 기다렸나?”
“아니에요.”
“예상치 않은 연락이라서…….”
시간을 빼기가 힘들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미 미룰 대로 미루었던 일이라 은소는 다소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다음부턴 일할 시간에 이런 전화는 삼가 줬으면 좋겠군.”
거래하듯 결혼을 결정짓고 함께 밥을 먹은 그날 이후 처음 만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혁은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러죠.”
은소가 내내 고심하여 내린 결론은 강 회장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절실히 이혁을 원하는 자신이 손에 쥘 수 있는 패는 기껏해야 형편없는 승률의 속임수 정도라는 것이었다.
은소는 자리에 앉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획일적으로 보이기 쉬운 회색 정장도 그가 입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치가 달라졌다. 셔츠 안에 숨겨진 근육과 탄탄한 어깨의 건장함이 눈에 띄었다. 딱 보기에도 완벽하게 다져진 신체였다. 그래서 남들보다 훨씬 큰 키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는 통에 그들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에스프레소.”
“녹차로 주세요.”
은소는 결혼하게 될, 그러나 여전히 남보다도 거리가 느껴지는 남자의 얼굴을 주시했다. 군더더기 없이 정갈한 남자의 얼굴이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받아 얼마간 부드러워 보였다. 옆자리 여자에게서 들린 작은 한숨은 은소의 심정과 같은 동질의 탄성이었으리라. 그러나 빛이 보여 주는 달콤한 착각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근처에서 면접이 있었어요. 예정보다 일찍 끝이 나서 잠깐 들렀어요.”
은소는 자신의 검정색 스트라이프 바지 정장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면접용으로 고르지 않았다면 지나치게 포멀한 스타일이었다.
“면접?”
“다시 건축 일을 시작할까 해서요.”
녹차 잔이 놓여졌다. 잎차가 아니라 아무 데서나 파는 티백 제품이었다. 그나마 팔팔 끓인 물을 곧장 들이부은 것인지 잔의 손잡이를 잡기도 뜨거웠다. 그렇다고 항의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미리 확인하지 않고 건성으로 주문한 자신을 탓할 수밖에…….
차 맛이 썼다.
“결혼식이 끝나면 출근할 거예요. 혹시 반대할 의사가 있다면…….”
이혁이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가 그 진한 액체를 반쯤 비웠다.
“그럴 생각 없어. 내가 거기까지 간섭해야 하나?”
한마디로 나는 너한테 관심도 흥미도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은소는 내키지 않는 미소를 억지로 자아냈다.
“고……마워요, 이해해 줘서.”
이혁이 빤히 은소를 응시했다.
“좋아. 서두는 끝냈다 치고 진짜가 나올 차례 같은데?”
자칫 혀를 델 뻔하고 은소는 쯧 혀를 찼다. 조금씩 식혀 가며 입김을 불어 냈다.
“세경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혁의 입가가 올라갔다. 김이 오르는 찻물을 일순간에 식혀 버릴 듯이 차가운 그림자가 생겨났다.
세경의 느닷없는 소동에 초조해졌을 부친이 따로 단속을 한 것일까? 아니면…….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내가 당신 여동생과 잠자리를 같이했는지 안 했는지 그게 궁금한가?”
“했나요?”
은소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태연자약하게 맛없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은…….”
떫은맛이 한결 가셨다.
“솔직하게 말해 두죠.”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생기지 않도록 은소는 신중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 결혼하지만 노력하기로 동의했어요.”
그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 안에 거짓, 속임수, 기만은 없어야 해요. 무엇보다 난 당신과 그 애가 떨어져 있길 바라요.”
“우리가 결혼하면 내 처제가 될 텐데?”
이혁은 그녀의 속을 읽고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세경과 그녀의 어긋난 악연을 알고 있다는 거다.
“맞욾요. 그러니 더더욱 여동생과 한 침대를 쓴 남자를 남편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하지만 이런 소리를 지껄여야만 하는 자신이 비참하고 끔찍해서 은소가 차라리 혀를 잘라내 버리고 싶은 심정이란 것까지 그가 알 리는 없었다. 그게 최소한의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확인 겸 경고차 이 자리를 마련한 건가? 파혼도 불사하시겠다?”
“이건 내가 정한 최소한의 룰이에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는 대가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데?”
“힘, 회사를 움직일 수 있는 권력, 그리고 재하.”
은소가 하나하나 나열했다.
“그 모든 걸 당신이 주겠다고?”
“아마 회장님이 이미 알려 주셨겠죠. 내 위치와 내 남편이 누릴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
은소는 심호흡 대신 테이블보에 가려진 손으로 지그시 무릎을 눌렀다.
“그래요. 당신에게 주겠어요, 재하를 마음대로 뒤흔들 권리를. 당신의 야심, 당신의 목표, 난 그걸 이루는 가장 빠른 티켓을 제공하는 열쇠가 될 거예요.”
“내가…….”
이혁이 차디차게 말을 끊었다.
“당신 아버지와 반목하게 된다면?”
그는 빙 돌려 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혁의 도전적인 공격을 은소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적해 냈다.
“그것은 내 남편의 자유예요.”
그러자 가벼운 경멸, 무시 같은 것이 그의 무심한 눈빛에 짧게 깃들었다.
“그걸 원하지 않았던가요?”
상처받는 대신 은소는 말갛고 투명한, 서늘한 우물과도 같은 시선으로 그의 냉혹한 턱 선을 응시했다.
“대단해. 상당히 감명 깊군. 하지만…….”
마치 동짓달 꽁꽁 얼어붙은 물을 정수리부터 발뒤꿈치까지 그대로 뒤집어쓴 듯한 섬뜩함이 후비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은소는 그가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에 그의 발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가 알 리가 없어!
“당신이 아니라도 난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재하를 부술 수 있어. 자신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매기고 있는지는 몰라도 반드시 당신의 ‘선심’이 필요하진 않다는 얘기야.”
“그런 착각을 하진 않아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두 사람의 눈동자가 상대방을 쏘아보았다.
이혁은 차분하게 차를 마시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만만하지 않았다. 갈수록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였다. 그만큼 꺼림칙하고 비위에 거슬렸다. 분명 그녀와 제대로 마주친 것은 오늘로 딱 두 번째인데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그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듯한 기분 나쁜 번득임이 순간순간 지나갔다. 그래서 이혁은 차라리 노골적이고 되바라졌어도 그의 예측 값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강세경 쪽이 더 구미에 맞았다. 방심할 수 없는 오리무중의 여자 따위가 그의 영토 안으로 기어들도록 내버려 두는 게 과연 이 시점에서 플러스가 될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생각이 바뀌셨나요?”
또다시 그의 의중을 자르고 들어오는 은소를 바라보는 이혁의 눈동자가 벨 듯이 예리해졌다.
“아니.”
“하나 더 고백할까요?”
난데없이 나온 고백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이혁은 설명할 수 없는 호기심을 느끼고 잔을 내려놓았다.
“난 당신에게 꽤 호감이 가요, 민이혁 씨. 굳이 회장님의 강압이 아니었다 해도 같은 결론을 냈을지도 모를 만큼…….”
은소는 침착하게 그의 눈을 똑바로 맞받으며 조용하게 말했다.
호감이라……. 첫눈에 반했다고 거짓말이라도 늘어놓을 셈인가?
이혁은 데면데면하기 그지없던 첫날의 은소를 떠올렸다.
“그렇다고 당신에게 그런 게 중요하다고 믿을 만큼 철이 없지는 않아요. 난 그저 이 결혼이 당신에게도 내게도 유리한 결정이 될 거란 걸 상기해 달라는 것뿐이에요. 적어도 서로가 싫어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이런 결혼이라도 괜찮은 출발점이 되지 않겠어요?”
이혁은 이상하게도 명치께가 무지근하게 불쾌해졌다. 뭔가 다른 걸 기대하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기분은 명쾌하지가 않았다.
이런 결혼이라도? 이 지루한 싸움의 원인과 나의 속셈을 알고 나서도 그렇게 오연하게 지껄일 수 있을까?
“그런가?”
결국 다른 듯해도 이 여자도 결국 근본은 강세경과 같은 여자였다. 쓸데없이 곤두서 있었던 거다.
이혁은 싹 가시는 흥미를 느끼고 시계를 보았다.
“볼일을 다 마친 거라면 먼저 실례해야겠군. 약속이 잡혀 있어서…….”
“그러세요. 저는 좀 이따 가죠.”
“그럼.”
그는 계산서를 챙겨서 성큼성큼 그녀로부터 멀어져 갔다.
은소는 이혁이 자동문 뒤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유지하고 있던 자세를 허물어뜨리고 털썩 힘을 뺐다. 등의 상처가 아픈 것과는 다르게 진동하듯 몸이 떨리고 있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삭여지지 않는 끈질기고 괴로운 감정, 은소는 얼얼한 둔통이 그녀의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자취 없이 사라질 때까지 멈춰 있었다.
사랑……, 메마르고 삭막한 그 남자의 가슴에서 그런 연약한 단어를 어떻게 찾아붳단 말인가?
식어서 쓴맛이 더해진 잔을 들고 은소는 쓸쓸하게 웃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을 붙잡으려고 쫓아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래서 당신이 행복해지길 소망한다면……? 이혁, 당신은……?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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