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부에서의 기자 생활은 흥미로웠다. 무엇보다도 기사를 작성하는 훈련을 좋은 선배들로부터 받아 글 쓰는 실력이 향상됐다. 오랜 기간 국제경제 동향을 추적하며 매일 기사를 쓰다 보니 국제경제에 대해 나름대로 식견을 갖추게 됐다. 외신부 ‘졸병 기자’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침 일찍 나오는 건 기본이다. 요즘 국제 뉴스는 모두 온라인으로 들어오지만, 당시는 ‘텔렉스’라는 장치를 통해 타이핑하듯 기사 내용이 인쇄용지에 찍혀 나왔다. 한경은 국제경제 전문 통신인 APDJ를 이용했다. 아침에 나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밤새 찍혀 나온 외신 인쇄용지를 기사별로 찢어서 분류한 다음 주요 기사들을 선별해 부장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 「 1부, 외신기자로의 첫 출발 」 중에서
서울경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당대에 내로라하는 필사인 경제 ‘대기자’ 선배들을 비롯해 뛰어난 선후배들과 같이 일한 경험이다. 복간 당시 주요 간부들과 정경부 기자들 면면을 보면 박병윤 편집국장(JBS일자리방송 회장, 전 국회의원), 고 김서웅 정경부장(전 뉴시스 회장), 고 박 무 정경부 차장(전 머니투데이 대표), 이병완 정경부 차장(여자농구연맹 총재, 전 대통령 비서실장), 이백만 차장(주교황청 대사, 전 대통령 비서실 홍보수석비서관), 최성범 기자(전 토마토TV 보도본부장), 이세정 기자(전 아시아경제 대표), 김병수 기자(전 두산그룹 커뮤니케이션 실장), 유상규 기자(코스콤 상임감사) 등이었다. 쟁쟁한 멤버들이었다. --- 「 1부, 폐간의 아픔을 딛고 복간한 서울경제에 합류 」 중에서
기자에게 특종은 기쁨, 낙종은 슬픔이다. 다른 기자들보다 중요한 기사를 먼저 써 특종을 한 다음 타사기자들이 자신의 기사를 받아쓰는 것을 보는 것은 상당한 성취동기를 느끼게 해준다. 낙종은 정반대다.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다. 기자는 늘 특종을 꿈꾼다. 하지만 낙종의 상처도 운명처럼 삼켜 넘길 수 있어야 한다. 특종과 낙종이 수시로 되풀이되니 냉·온탕을 오가는 식인 것이다. 그래서 특종에 겸손하고, 낙종에도 평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 1부, 특종의 기쁨, 기자는 이 맛에 한다 」 중에서
쌀 개방 협상 관련, 취재 후기가 한 가지 더 있다. 쌀 개방에 대한 국내 반발이 거셌기 때문에 정부는 초기에는 미국과의 접촉 자체를 부인하고 있었다. 1993년 11월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쌀 개방 이슈를 보도하기 위해 이 협상의 주무 부서인 경제기획원 대외조정실 촬영이 필요했다. 기획원의 허락을 받아 사무실 촬영을 했다. 촬영을 하게 되면 카메라 기자는 사무실 전경을 찍는 ‘풀 샷(Full Shot)’ 외에 일하는 직원 얼굴과 컴퓨터 화면 등을 클로즈업하는 영상도 찍는다. 정보를 훔치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촬영의 ‘ABC’이다. 이 화면을 회사에 돌아와서 돌려보는데 컴퓨터 화면에 ‘이상한 서류’가 나왔다. 한미가 쌀 개방 협상을 놓고 이미 접촉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보도하는 게 맞다고 판단해 방송에 내보냈다. --- 「 2부, 방송 취재 현장 곳곳을 누비며 」 중에서
나는 YTN 합류 후 두 달간 기존 멤버들과 함께 개국 준비를 위한 강행군에 들어갔다. 한국 최초의 보도 채널인 만큼 다소 거칠더라도 가장 빠른 속보를 전달하는 시스템 구축에 모두가 전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1995년 3월 1일 오전 11시 58분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연합통신 빌딩의 12층 YTN 1부조 안에서는 긴장 속에 ‘애국가 스타트’를 외치는 PD 콜이 있었고, 애국가에 이은 ‘YTN24’ 뉴스를 시작으로 YTN이 첫선을 보였다. ‘살아있는 뉴스’, ‘깨어있는 방송’을 슬로건으로 내건 YTN은 이때부터 쉼이 없는 24시간 뉴스체제의 깃발을 올렸다.--- 「 2부, ‘한국의 CNN', 그 꿈을 향한 첫 걸음 」 중에서
우리 경제는 IMF로부터 긴급 자금 수혈을 받아 위험한 고비는 넘겼지만 그게 바로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IMF 프로그램에 따라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되고 많은 근로자가 실직의 아픔을 겪게 된다. 이 여파가 YTN에도 미치기 시작했다. 멀쩡한 대기업들이 부도가 나고, 거의 모든 기업이 자금난을 겪으면서 광고 물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1995년에 개국해 적자를 지속하고 있던 YTN은 ‘바람 앞의 등불’같은 신세가 됐다. 1998년 초부터 회사 금고가 바닥나 월급을 줄 수 없게 됐다. 급여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반년이나 이어지니 직원들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적금은 깨는 것은 물론 나중에는 보험까지 해지해야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방송은 매일 나가야 하는데 후배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조차 미안한 상황이었다. --- 「 2부, 외환위기, 월급을 못 받아도 꺾이지 않았던 기자정신 」 중에서
1995년에 입사해 1999년 해외 연수길에 오르기까지 4년여 동안 YTN에서 우여곡절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무엇보다 한국 최초의 24시간 보도 채널의 기초를 닦고 주춧돌을 세우는 일에 참여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YTN의 앞길을 개척해가는 길에는 적지 않은 암초가 있었다. 개국 초기에는 24시간 뉴스를 한다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었고, 게다가 시청 가구도 얼마 되지 않은 구조적 문제에 직면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 안타까운 대형 참사가 시시각각 현장의 상황을 생방송으로 전하는 보도 채널의 중요성을 한국 사회에 각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 기회의 깃발도 잠시 펄럭이다 멈출 뻔했다. 외환위기의 쓰나미가 몰아닥치면서 회사의 금고가 바닥나 문을 닫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다 공기업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증자로 YTN은 회생과 정상화의 길로 들어섰다. 말 그대로 ‘청룡열차’를 타는 듯한 굴곡과 시련의 과정이었다. 후배들과 함께 주눅 들지 않고 한 발 한 발 앞만 보며 묵묵히 일하면서 회사를 지켰고 그러는 사이 풍파는 잔잔해졌다. 위기는 이를 용기 있게 헤쳐가는 자에게는 기회가 된다고 했다. YTN이 그랬고 그 과정에서 나도 단단해졌다. 힘들었지만 값진 경험이었다. 해외 연수 길에 오르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 「 2부, YTN 회생 후 해외연수의 길로 」 중에서
중간평가에서 과반의 불신임으로 퇴진하게 된 사장으로서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구구절절 많은 말을 하고 싶진 않다. 한바탕 악몽을 꾸고 난 뒤의 느낌이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노조의 왜곡되고 과장된 비난으로 실제 모습과 전혀 다른 ‘괴물 최남수’가 만들어진 데다 내 참모습을 알릴 수 있는 경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는데도 44%의 직원이 신임해준 데 대해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사장도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인격과 명예가 있는데 지나치게 매도당한 것은 두고두고 섭섭하다. 선후배 관계로 평생 쌓아온 관계마저 무너져가는 걸 보는 것은 가슴 아리는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노조의 비난에 대해 여기에서 세세히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방어권을 행사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뒤늦게나마 진실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 「 3부, ‘친정인 YTN으로... 미완의 꿈 」 중에서
2017년 말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 나는 언론인으로서의 마지막 일터라고 생각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공정하고 튼튼한 YTN’을 만들어 후배들에게 넘겨줘야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그들과 삶을, 세상을 보는 시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건만 그들은 나를 ‘괴물’로 만들어 내 삶에 큰 생채기를 남겼다. 2018년 2월 2일 오후 사장실 앞에서 노조원들에게 4시간 넘게 감금된 상태에서 후배들에게서 들어야 했던 고성과 욕설, 조롱 등 집단린치와 언어폭력의 현장을 특히 잊을 수가 없다. ‘퇴진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던 협박에 나는 굴복하지 않았다.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나는 오롯이 혼자 버티며 그들이 길을 열어줄 때야 나갈 수 있었다. 모든 오욕의 시간은 사장실을 비워준 5월 4일 종료됐다. --- 「 4부, YTN 그 후 」 중에서
내가 이직을 하게 된 동기는 호기심에서 우러나오는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의식이었다. 신문기자를 하다가 방송기자로 전직한 것은 영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방송을 배워보고 싶어서였다. YTN으로 옮길 때는 ‘한국의 CNN’을 만들자는 꿈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SBS와 YTN에서 뉴스 PD를 하면서 방송 제작의 전반을 배운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방송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어서 나중에 방송사 경영을 할 때도 전체를 조망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38살의 나이에 해외연수 길에 오른 다음 40살에 회사를 그만두고 학업을 계속하는 결정을 한 것은 큰 모험이었다. 42살에 학업을 마친 다음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일을 저지른 다음 용기를 가지고 열심히 준비하면 그다음 일은 수습된다. 걱정하기보다 도전하는 게 의미 있는 이유이다. --- 「 4부, 인생에 늦은 때는 없다 」 중에서
나는 한국은행과 금융권을 3년 반이나 출입했다. 가장 많은 특종이 나왔던 기간은 내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여기저기를 열심히 찾아다녔던 첫 1년이었다. 낙종이 종종 나왔던 때는 출입 후반부였다. 통화정책이나 금융이 눈에 들어온다고 책상에 앉아 취재하다 보니 현장을 놓치는 때가 있었다. 특종은 ‘부지런한 발’에서, 낙종은 ‘게으른 발’에서 나온다. 기자는 또 호기심이 많고 사소한 것도 지나치지 않는 민감함을 가지는 게 좋다. 작은 것이 단서가 되어 큰 문제 제기로 이어지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대기업 총수들이 회사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 가는 관행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국세청 보도자료의 구석에 있었던 한 문장이 단서가 됐다. 그걸 실마리로 해서 깊게 취재해 들어가니 전모가 보였다.
--- 「 4부, 어떤 기자가 좋은 기자인가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