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care이다. 저자는 이를 ‘돌봄’과 ‘걱정’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돌봄’과 ‘염려’를 상징하는 쿠라 여신이 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었기에, 인간의 본성에는 흙을 돌보고 염려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원사로서 인간이 이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보고 있다. 정원사는 일 년 내내 한결같이, 심지어 ‘날씨까지도 경작하며’ 정원을 돌보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정원을 걱정해야 하는 운명이다. 거대하고 강력한 자연 앞에서 무력한 인간은 정원을 돌보며 겸손을 배우게 되고, 따라서 흙을 경작하는 일은 인간성을 가꾸는 행위로 확장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원사로서 인간은 자신이 가꾸는 한 뼘의 땅에서부터 지구 전체로까지 관계를 확장하고, 사고와 인식의 폭을 넓힌다. 경작과 돌봄은 생명이 생겨나 유지되려면,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흙에 관한 진실을 들려준다.
에덴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 갖춰져 있기에 ‘돌볼’ 필요가 없다. 따라서 아담과 이브는 어린 아이 같았지만, 추방된 뒤 경작을 통해 비로소 성숙한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에덴에서의 추방이 인류가 받은 벌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으로의 귀환이라는 해석이다. 여기서 저자는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비타 악티바(vita activa)’ 개념을 빌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활동적 삶은 생존을 보장하는 노동(labor)과 문화적 활동을 포괄하는 작업(work),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이 자신을 확신하게 되는 행위(action)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에덴에서 추방된 후 비로소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가 결합된 활동적 삶을 영위하며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이 세 가지 중 어디에 속하는가? 여기서 ‘가꾼다(cultivate)’의 의미를 성찰하는 것 역시 이 책을 읽는 중요한 관점 중 하나이다.---p.11~12
우리가 정원에서 접하는 자연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야생의 자연이 아니다. 이미 문화라는 필터를 거친, 가꾸어진 자연이다. 따라서 정원은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었다는 표시가 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정원은 동물적 욕구와는 구별되는 인간적 욕구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 기본적인 생필품도 부족한 노숙자들이 생존과 관련 없는 정원을 만드는 뉴욕의 홈리스 정원의 예를 들고 있다. “소위 일시적인 정원을 만들도록 하는 근원적인 인간적 욕구”가 바로 창조적 표현의 욕구라는 것이다. 버려진 장난감이나 쓰레기, 나뭇잎 등으로 만들어진 집 없는 이들의 정원은 통념적인 정원은 아니지만 의미나 기능상 정원이다. 그리고 정원을 만드는 행위는 자신을 표현하고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활동이다.---p.12
정원을 가꾸는 일은 일견 사적인 일처럼 느껴지지만 이는 무수한 대화의 단초를 만들어낸다. 역사적으로도 정원은 대화의 장소이자 대화의 주제로서 사람들을 모으는 힘을 가지고 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정원이 교육 공간의 물리적 환경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지적하며,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부터 오늘날 대학의 캠퍼스까지 이어지는 정원과 교육기관의 오래된 관계를 풀어나간다. 에피쿠로스는 사실 정원에서 성장과 쇠퇴, 평온, 땅과 물, 햇빛의 상호작용 등의 자연의 방식을 교육했다. 또한 돌봄을 통한 정원 일은 물리적인 행위이기도 하지만 플라톤이 교육자를 영혼의 정원사에 빗대었듯이 진정한 교육을 은유하기도 한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우정어린 대화를 통해 사회성을 함양하는 교육의 공간이었다. 이렇듯 정원의 가치는 은유적으로도 드러나는데 에덴을 꿈꾸었던 중세 수도원의 숨겨진 정원 혹은 군주에게 바쳐진 정원과 달리 민주주의가 꽃피었던 15세기 피렌체공화국은 그 자체로 열린 정원으로 묘사된다. 공화국은 정치적 토론과 시민적 자질을 함양하는 대화의 정원이었고, 시민들은 정원사에 은유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오늘날 도시 정원에서 재발견되는 ‘공공성’의 가치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한다.---p.13
능률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근대적 관점에서 보면 정원은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인간의 속도가 아니라 자연의 흐름을 따르고, 때로는 인간의 무력함을 절감하며, 어떤 성과보다는 ‘정원 안에서 삶으로 키워내는 것의 행복에 헌신’하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에 최대한의 결과를 생산해내는 것이 미덕인 오늘날 시간을 들여 무엇인가를 돌보고 바라보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태도는 정원을 가꾸는 일뿐 아니라 감상하는 데에도 방해가 된다. 감동조차도 스펙터클로 환원하여 최대한 강렬하게 서둘러 맛보고자 하는 현대인에게 관조는 따분하고, 한가로운 일로 치부된다. 우리는 관광지가 되어버린 유명한 정원을 방문하지만 팸플릿에서 보는 이미지 이상을 보지 못하고, 잠시 머물며 기념사진을 찍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표피적인 이미지가 넘쳐나지만 내면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는 본질적인 모습은 놓치고 만다. 이는 우리의 존재방식이 변화하면서, 우리의 보는 방식도 변했기 때문에 정원을 온전한 존재로 보는 일이 기본적으로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보기 좋게 꾸민 공간과 돌봄이 있는 정원을 혼동한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정원에는 ‘정원을 가꾸는 일’이 부재하지 않은지 자문해볼 일이다. 저자가 ‘정원 없는 시대’라고 규정한 오늘날에도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는 볼테르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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