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이 사라져가는 세상을 무턱대고 받아들이다가는 결국 후회하게 될 것이다. 현금 결제가 되지 않는 주차장에서 휴대전화와 씨름하는 일처럼 지금은 사소해 보이는 문제가 결국 기득권 세력이 우리 삶을 통제하는 디스토피아 세상이라는 끔찍한 문제로 진화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막대한 권력을 우리 스스로 그들에게 내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할 것이다.
우리는 현금을 당연시한다. 현금이 어디든 있고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든 말든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현금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떨까?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하룻밤 사이에 주머니 속 지폐와 동전이 모두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나 쇳조각이 되어버렸다면 어떨까? --- 「1장 현금 없는 주차장」 중에서
인도 정부만 현금 사용을 중단하도록 시민들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다. 2013년 스웨덴 중앙은행은 고액권인 1,000크로나 지폐를 폐지했다. 스웨덴의 시중 은행 지점 대부분이 더 이상 현금을 취급하지 않는다. 또 상점이나 주점을 포함한 가게들은 ‘현금 없는 구역’이라고 쓰인 표지판을 자랑스럽게 내걸고 있으며 교회에서는 헌금 접시 대신 전자카드 결제 단말기로 헌금을 받는다. 심지어 길거리 잡지를 파는 노숙자들까지 모바일카드 결제에 필요한 카드 단말기를 지급받아 사용하고 있다. 덴마크는 새로운 법을 마련해 상점들이 현금 결제를 거부하고 카드 결제만 할 수 있도록 했다. 2015년 프랑스는 1,000유로 이상의 현금 결제를 법으로 금지했다. 스페인도 프랑스와 유사한 법안을 발의했다. 미국 남부의 루이지애나주에서는 중고품을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이 불법이다. 멕시코에서는 은행 계좌에 매월 1만 5,000페소 이상을 입금할 경우 초과 금액의 3퍼센트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터키에서 중앙은행을 대신해 카드를 발행하는 인터뱅크카드센터는 새로운 지불 시스템이 2023년까지 터키 경제를 완전히 현금 없는 경제로 만들어줄 초석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정부가 승인한 단일 지불 시스템을 도입했다. --- 「2장 현금 없는 사회」 중에서
현금은 우리가 금융 산업을 견제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지불 수단이다. 독점 기업의 서비스를 거부하고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거래 수단이다. 그나마 은행이 합당한 수준으로 수수료를 유지하고, 그럭저럭 괜찮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애쓰고, 우리 돈을 자기 돈 쓰듯 함부로 쓰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언제든 돈을 인출해 보관할 수 있으며 은행을 이용하지 않고 우리끼리 거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금을 없애려는 은행에 동조하고 은행이 우리를 휘두르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정신 나간 행동이나 다름없다. --- 「4장 현금 없는 사회의 악몽」 중에서
케네스 로고프는 그의 책 《화폐의 종말》에서 “마약 밀매, 공갈, 갈취, 공무원의 부정부패, 인신매매, 돈세탁을 포함한 광범위한 범죄 활동에서 현금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적어놓았다. …… 앞서 언급한 로고프의 주장은 온라인에서 전자 화폐 관련 범죄가 넘쳐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좀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현금과 범죄가 상관관계에 있다는 주장으로 2015년 영국 은행 고객들이 카드 결제, 온라인 뱅킹, 부정 수표(극히 일부) 관련 범죄로 총 7억 5,500만 파운드를 잃었다는 충격적인 통계를 어떻게 설명할까? 이 통계에 속한 범죄자 중 누구도 현금이 들어 있는 돈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은행 고객들의 돈은 불법 계좌 개설을 막기 위해 마련된 규제 장치를 보란 듯이 뚫고 개설한 범죄자의 계좌로 흘러 들어갔다. --- 「5장 현금과 범죄」 중에서
우리가 은행에 의존하도록 만들려는 이유를 은행의 입장에서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백억 파운드에 달하는 현금을 턱없이 낮은 예금 금리로 예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행에 돈을 예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경우 은행과 달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대로 우리가 현금을 자주 사용하지 않더라도 돈을 인출하고 보관할 수 있는 선택권을 지킨다면 은행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현금 없는 사회가 되면 그러한 힘을 잃게 될 수밖에 없다. --- 「7장 신뢰할 수 없는 은행」 중에서
2014년 12월, 전 세계 모바일 화폐 계좌 3억 개 중 절반에 가까운 1억 4,600만 개가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등록된 계정이었다. 세계은행의 추산에 따르면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의 경우 1인당 소득이 1,630달러다. 영국과 미국의 1인당 소득이 각각 4만 1,230달러와 5만 7,540달러임을 감안하면 매우 낮은 소득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역이 휴대전화를 기반으로 한 현금 없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 다른 어느 국가보다 한참 앞서 나가고 있다. 모바일 화폐 계좌가 두 번째로 많은 지역 역시 유럽이나 북아메리카가 아닌 계좌 7,690만 개가 등록되어 있는 남아시아 지역이다. 어째서 그럴까?
그 답은 바로 유엔 회원국, 개발도상국 정부, 비정부 기구, 자선 단체, 상업계가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에게 휴대전화 결제를 사용하도록 적극 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 소비자들이 현금 폐지에 다소 반감을 드러내는 가운데 지불결제업계는 가난한 국가에서 실험 대상으로 삼을 만한 소비자를 충분히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 「12장 실험 대상이 된 개발도상국」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