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에 있는 딸 미아(美雅)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일주일 전 이었다.
미아는 갑자기 한국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세이코는 태평양 건너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한국’이라는 단어에 갑자기 온몸에 감전이라도 된 것 같은 찌릿한 충격을 느꼈다. 아득하게 현기증까지 일었다. 전화기를 바짝 귓가에 갖다 댔다. 미아가 언젠가는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가겠다고 결심할 때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정말 뜻밖이었다.
미아는 보스턴 대학 대학원 조교수로 동북아시아 고대 문화사를 강의하고 있다. 미아가 지난 여름에 도쿄에 왔을 때, 일본의 고대사와 그에 얽힌 한국의 고대사에 대해서 잠깐 언급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가겠다고 얘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이코는 전화기를 손바닥으로 가리고 전화선 너머 딸이 눈치 채지 않게 짧게 심호흡을 했다.
미아가 탄 뉴욕 발 인천 행 노스웨스트항공 N771편은 나리타 (成田) 공항을 경유한다. 미아와는 공항에서 잠시 얼굴을 보기로 했다. 미아는 나흘간 한국에 머문 뒤 도쿄로 돌아와 세이코와 열흘간 같이 있겠다고 했다.
세이코가 운전하는 파란색의 벤츠 이 클래스 컨버터블은 도 쿄만을 가로지르며 시바우라(芝浦)와 다이바(台場)를 연결하는 레인보우 브리지를 건너 공항으로 가는 좌측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부드럽게 맞바람을 맞으며 도로 위를 달리는 세이코의 승용차는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차 안으로 들이치는 바람이 세이코의 은색 머리칼을 흩날렸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그녀의 얼굴은 단정했다.
내 딸이 한국에 간다. 내 딸이 드디어 ‘그’의 나라, 한국에 간다.
세이코는 온갖 상념이 일었다. 딸이 아버지 나라를 찾아가겠단다. 얼굴도 못 본 아버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나라 한국, 그 낯선 곳으로 가겠다는 딸의 결심은 세이코에게 충격을 안겼다. 그러나 세이코의 마음 한편으로는 딸이 한국에 간다는 사실을 담담한 심정으로 받아들이려고 애써서 마음을 다잡았다.
김재오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드문 경우였다. 일본은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실질적인 원인 제공자이며 전쟁 가해자지만 일본 정부는 전쟁 책임을 조직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더구나 스물 일곱 살이면 전쟁세대도 아닌 전후세대가 아닌가. 젊은 일본 여성이 자국의 원폭 피해자도 아니고 이웃나라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겠다고?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일본 히로시마(?島)와 나가사키(長 崎)에 미군의 원폭투하 당시, 피폭당한 조선인 원폭 피해자들은 7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에 이른다. 전체 원폭 피해자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 이들은 일본 사회에서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1946년을 전후로 4만여 명이 한국으로 귀국했다. 일본의 ‘피폭자 원호법’은 차별적이었고 한국 정부는 무지했고 안일했다. 정확한 피폭자 통계도 없었고 기본적인 인권은 어디에도 기대할 수 없었다. 한국인 피폭자들은 빈곤과 병고의 고통 속에서 나날을 살아갔다. 끔찍한 고통의 대물림은 원폭 2세, 3세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김재오는 도쿄 특파원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일본인 사진작가가 입국을 하는 날, 시간에 맞추어 김포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세이코가 김재오의 손을 잡고 유리벽 앞으로 이끌었다,
물고기 떼는 두 사람이 다가서자 놀란 듯이 흩어졌다가 다시 두 사람 앞 유리창으로 모여들었다. 물고기들이 유영(游泳)하는 모습은 화려했다. 김재오는 투명하게 반짝이는 아주 작은 물고기 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위해 세이코가 잡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풀었다.
물고기들은 물속을 비추는 컬러 조명을 지날 때마다 색을 바꾸어 물살을 갈랐다.
물고기들은 울긋불긋 떼를 지어 매끄럽게 김재오를 향해 돌진해왔다가는 그의 머리 위를 지나 헤엄쳐 멀어져 갔다. 김재오는 어디 별세계에라도 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이코는 물고기 떼를 바라보는 김재오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갑자기 그녀의 내부에서 실제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생생히 느끼는, 가슴에 고동치는 소리가 가차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세이코는 김재오의 옆모습을 숨죽이고 한동안 지켜보고 서 있었다. 김재오의 표정에는 빛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눈빛엔 사려 깊은 정신과 의지가 있었고 이마는 빛났지만 절대 오만하게 보이지 않는 깨끗한 성품을 읽을 수 있었다. 세이코는 김재오가 눈치 채지 않도록 조용히 김재오의 옆모습을 세세하게 관찰했다. 수족관 전망 창을 들여다보는 김재오의 조용한 얼굴에 이는 미묘한 표정이 세이코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세이코의 마음이 김재오에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곡차곡 김재오에게 향하는 마음이 쌓여가는 자신을 느꼈다.
김재오가 세이코에게 몸을 돌렸다. 세이코는 갑자기 팔을 뻗어 김재오의 목을 감쌌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김재오는 아주 잠시, 짧은 시간 동안 당황하는 듯했고 입술을 움직여 뭔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세이코의 숨결소리와 그 떨림에 김재오의 눈은 저절로 감겼고 그녀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입맞춤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수족관 안에 물고기들은 화려한 군무(群舞)를 추고 있었다.
“미치코 언니, 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세이코는 망설이다가 불쑥 이 말부터 했다.
“그래? 정말이니? 아! 축하할 일이구나! 축하해! 세이코! 그래? 그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야?”
“신문사 기자.”
“기자? 신문사에?”
“응.”
“어디 신문사인데?”
“......”
“도쿄에 살겠지? 그 사람은?”
“아니.”
“어디? 오사카?”
“도쿄가 아니고 서울이야.”
“서울?”
“응.”
“한국? 그럼 일본 신문사 특파원으로 한국에 파견을 나가 있구나?”
“아니. 한국인이야.”
“한국인? 한국인이라고? 그럼? 한국에 있는 신문사 기자라 말이니?”
“응.”
“.... 어떻게 만났니? 언제부터?”
“.... 언니, 나, 그 사람 사랑해! 진짜 사랑해!”
“......”
“엄마 아빠가 아시면 너무 놀라시겠지?”
“......”
세이코는 미치코 언니의 눈을 보면서 말을 하다가, 그만 눈물을 흘렸다.
미치코는 세이코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면서 살며시 어깨를 끌어안았다.
“세이코, 울지 마.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왜? 울고 그래?”
“언니, 나, 있잖아. 나, 그 사람 만나러, 한국에 가야 돼! 빨리 가봐야 돼!”
“그랬구나. 세이코. 정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나 보구나. 축하해.”
“언니, 그런데 말이야, 언니,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다치거나 죽으면 안 돼. 절대 안 돼!”
세이코는 언니 미치코의 품속으로 안기다시피 하면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김재오, 김 상, 왜 나는 그의 운명 속으로 파고들었는가, 왜? 나는 그의 손을 잡았는가.
나는 김 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김 상은 돌연 행방을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또 어제도 오늘도, 나는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김 상은 무기력하게 끌려가 권력에 굴종할 사람이 아니다. 그냥 이대로 끝날 사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비굴한 아첨이나 흘리는 말로 이 부조리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그는 곧장 앞으로 진격하고 돌진할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이 무엇보다 무섭다. 무엇을 위한 무엇을 향한 돌진인가.
내게 있어서 김 상, 그는 삶으로 이어지는 길이며 내 삶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어쩌면 오랫동안 그와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면? 그의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그의 목소리도 못 듣고, 그의 눈을 쳐다볼 수도 없다면?
세이코는 외롭고 무서웠다. 그러나 세이코는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에 기필코 다짐할 말이 있다고 스스로 새겼다.
‘그는 분명히 살아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