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신학이 처한 비애는 그 거짓된 겸손에 있다. 신학에 있어 이러한 태도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왜냐하면 신학이 메타담론이기를 포기한다면, [...] 만약에 신학이 여타의 담론들을 자리매김하고, 그 한계를 정해주며, 때로 비판하는 과업을 더 이상 수행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담론들이 역으로 신학을 자리매김하는 일이 불가피하게 초래될 것이다.
[...]
그렇지만 그리스도교는 어떤 원초적 폭력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무한자를 혼돈이 아니라 하나의 조화로운 평화로 보는데, 이 조화로운 평화는 모든 것을 전체화하는 이성이 지닌 구속의 권력을 넘어선다. 평화는 더 이상 자기동일성에로의 환원에 의거하지 않으며, 다만 조화로운 차이를 지닌 사회성(sociality)일 뿐이다. [...] 그와 같은 그리스도교의 논리는 근대적 세속이성으로 해체할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교는 차이, 비전체화, 의미의 불확정성이 필연적으로 자의성과 폭력을 함축한다고 하는 니체식의 가정이 결코 필연적이지 않음을 드러낸다.
_“서론” 중에서
한때 “세속”(secular)이란 말은 존재치 않았다. [...] 오히려 사제권(sacerdotium)과 왕권(regnum)이라는 이중의 측면으로 이루어진, 단일한 그리스도교 왕국 (Christendom)이 존재했다. 중세 시대에 세속을 가리키던 세쿨룸(saeculum)이란 말은 공간이나 영역이 아니라 시간, 즉 타락과 종말(eschaton)사이의 중간기(interval)를 의미했다. [...] 이론상으로나 실제에 있어서, 하나의 영역으로서 “세속 부문”(the secular)을 정립하거나 혹은 상상해내야만 했다. [...]
이렇듯 신학이 지배권을 절대적 주권과 절대적 소유권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팍툼(factum)을 인간 자율성의 영역으로 확보해온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로써 팍툼은 하나의 세속 부문, 즉 세속에 대한 세속적 지식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버린다?이러한 공간은 인간이 만든 여타의 모든 지형도들만큼이나 허구적인 것에 불과하다.
_제1장 “정치신학과 새로운 정치학” 중에서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합리성이냐 비합리성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정치경제학에 관한 이러한 탁월한 시각에 내포된 “신이교적” 성격이며 그리스도교 신학이 거부해온 리비도 도미난디(libido dominandi: 지배의 욕망)에 대한 노골적 찬양의 태도인 것이다. 여기서 다시금 우리는 세속이성의 “자율성”이 자신의 독립을 위한 조건으로서, 그리스도교가 일찌기 문제시했던 바로 그 관점에 대한 찬동을 포함하고 있음을 목도한다.
[...]
정치경제학은 도덕적 입장을 고려하는 가운데 경제적 제반 관계의 형식적 측면을 추상화하여 탐구했던 하나의 해방된 세속 학문이 아니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겠다. 도리어 그것은 도덕과는 상관없는 형식적 메커니즘의 형성을 구상하고 또한 촉진함으로써 세속의 성립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세속의 보존과 지배에도 일조했다. 이렇듯 정치경제학을 은폐하고 있는 “새로운 과학”이라는 가면을 벗겨내고 나면, 그것이 경쟁법칙이자 신정론이자 그리스도교적 덕성에 대한 이단적 재 정의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_제2장 “정치경제학은 신정론이자 경쟁의 법칙” 중에서
따라서 “과학적 연구”는 사회적 전체로부터 시작할 수 없고, 개인의 행동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없다. 요컨대 실증적 과학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과학도 성립할 수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 둘을 조합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은 둘 다 전적으로 우발적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끊임없이 변형을 가하기 때문이다. [...]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도식 대 내용의 관계나, 전체 대 원자적 부분 간의 관계와 같지 않다. 따라서 이율배반은 오로지 서사를 통해서만 매개될 수 있다. 사회적 행동을 가능케 하는 제반 조건에 대한 적절한 “선험적” 성찰을 하다 보면 결국 역사에 대한 서술이 불가피함을 깨닫게 된다. “사회과학”이 들어설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_제3장 “사회학 I: 말브랑슈에서 뒤르켐까지” 중에서
그렇지만 “현세적”이란 용어는 베버가 선험적으로 가정한 범주로서, 경제?정치적 내지 성애적 활동이 지닌 “자연적” 성격에 따라 설정된 한계 내에 존재하는 영역이다. 반대로 신학이 근대의 경제적 실천에 미친 영향에 관한 핵심은 금욕주의가 “현세”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이 “현세”를, 즉 인간의 도구적 조작이 가능하도록 하나님이 넘겨주신 영역으로서의 세속을 발명(invention)한 것이다. [...] 베버는 이러한 변화를 반 정도밖에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금욕(ascesis) 개념이 그 본령이 되는 목적론적 전제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에 관심하기보다는 근대적 금욕의 실천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영역에서 전개된 것에 집중했다.
_제4장 “사회학 II: 칸트에서 베버까지” 중에서
“헤겔에 대한 동의”(for Hegel)란 말은 그가 근대 정치이론과 정치경제학 및 칸트 철학에 대한 (헤겔적인 의미에서 “이성적”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교적”인) 비판을 제시하였다는 뜻이며, 따라서 이 말은 질리언 로즈의 말마따나 사회학적 전통 에 대한 선구적 비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서는 헤겔의 이러한 비판을 계승하면서 또한 헤겔이 시작한 네 가지 과제를 재개할 것을 권고한다. [...] 네 번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리스의 철학적 로고스(logos)를 신학적 로고스와의 만남을 통해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사고 자체가 불가피하게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되며, 그리하여 우리는 “세속이성을 넘어 선다.”
[...]
헤겔에 반대하여 제기할 수 있는 주요 비판점은 “변증법”이야말로 근대 정치학과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변종(new variant)이라는 사실이다. [...] 헤겔의 논리 자체는 단지 또 하나의 “정치경제학”이며, 따라서 불가피하게 또 하나의 “신정론”으로 전락한다. 그렇지만 변증법이 부등발생의 경제논리를 밝혀내어 그것을 초월적 숙명에 연결하는 새로운 자원을 발견한 것은 사실이다. 그 새로운 자원이란 야코프 뵈메(Jakob Bohme)를 거쳐 독일의 사상적 전통에 전달된 신성의 자기소외(divine self-alienation)에 관한 “이단적”이고 “영지주의적”인 사상을 말한다.
_제6장 “헤겔에 대한 동의와 반대” 중에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과 근대 “정치학”이 [...] “세속” 권력과 권위를 정의하고 구축하는 데 기여한다고 비판하는데, 이런 까닭에 마르크스를 세속에 대한 해체의 시도로 읽어낼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이 장은 “마르크스에 대한 동의”(for Marx)를 표하면서, 자본주의와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적 비판의 특정한 요소를 보존하고 다시 가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계 전체가 순전히 우발적 산물에 불과함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우발적 비전과 실천에 해당되는 다른 것(그리스도교?옮긴이)의 이름으로 자본주의에 대해 도덕적 비판과 반대가 가능하다는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 대신에 마르크스는 두 가지 뚜렷한 방식으로 자유주의적 관점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첫 번째로 그가 헤겔 변증법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을 제공하면서도 여전히 자본주의 경제를 하나의 필연적 국면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붕괴 후에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으로 상정하는 유토피아적 국면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는 주로 인간의 자유를 해방하고 자연을 변형시키는 인간의 무제한적 가능성이라는 견지에서 구상되고 있다.
_제7장 “마르크스에 대한 동의와 반대” 중에서
하지만 해방신학자들이 뤼바크나 발타자르와 같은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통합주의에 함축된 가능성을 충분히 천착해서 사회신학 내지 정치신학을 발전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여전히 옳다고 하겠다. [...] 여기서 블롱델의 행동(action) 개념, 즉 지식을 발명으로 간주하고 초자연적 지식이 인간의 창조적 추구를 통해 매개 된다고 보는 그의 사상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 매우 긴요하다고 하겠다. 블롱델의 “초자연적 실용주의”(supernatural pragmatism)는 사고와 행동이 불가분적으로 융합되어 하나의 전통으로 발전한다는 뜻에서 실천을 근본적 계기로 삼고 있는데, 이 점에서 그의 “초자연적 실용주의”는 정치신학 내지 해방신학에서 주장하는 “토대적 프락시스”(foundational praxis)의 개념과 대조된다고 하겠다. 포에시스가 세속을 만들어 낸다고 보는 근대의 지배적 전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정치신학은 그 포로로 전락한 반면에, 블롱델이 말하는 자기박탈적 행동(a selfdispossessing action)은 탈근대적 사회 신학을 향한 길을 지시해준다.
_제8장 “초자연의 토대를 놓기” 중에서
그러므로 본장은 첫째로 허무주의적 계보가 폭력의 존재론을 필요로 한다는 것과, 둘째로 이 존재론이 그저 하나의 신화론에 불과하다는 것과, 셋째로 그마저도 전적으로 해로운 신화론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러한 세 가지 논증을 다 거쳐 가다보면 네 번째 주제가 부상할 터인데, 이를테면 이 신화론이 자기기만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세속에 대한 최선의 자기 묘사(self-description)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것은 세속이 단지 또 하나의 종교에 불과함을 자기가 보여주었다는 점을 시인하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 바로 그 지점에서 실패하는 셈이다.
_제10장 “존재론적 폭력 또는 탈근대적 문제들” 중에서
신학 자체가 인간의 역사에서 작동하는 최종 원인들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제공해야 하며, 이를 위해 특수하면서도 역사적으로 고유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그 토대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차별화된 그리스도교적 사회이론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차별화된 그리스도교적 행동양식 즉 뚜렷한 그리스도교적 실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발생하여 특수한 역사적 발전을 거쳐서 존재하는데, 이것에 대해 사회이론은 설명을 제공한다. 따라서 그 이론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교회론(ecclesiology)이며, 그다음으로 교회가 여타의 인간사회와 맺고 있는 연속적?불연속적 관계 속에서 나름의 실천을 행하는 가운데 자신을 정의하는 정도로 그러한 사회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사회관이기도 하다. [...]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신학은 [...] 신스콜라주의적으로 신앙을 이성이라는 보편적 토대에 접맥하기 위한 모든 시도를 포기하는 대신에, 그것은 교부들에게로 얼굴을 돌려 사실상 교부들을 넘어서 그리스도교적 로고스 곧 성육신과 오순절의 표지를 지닌 그러한 이치(reason)를 구체화하려고 한다.
_제12장 “다른 도성: 신학은 하나의 사회과학” 중에서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 곧 하나님의 심판 사건의 저편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사법적 체제 곧 폭력의 억제를 위한 고대적 타협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다. 허무주의와 그리스도교는 모두 이러한 입장이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해독해낸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평화를 추구하는 가톨릭적 비전만이 현재 허무주의적 관점에 대한 유일한 대안을 제공한다. 오늘날에도 세속이성은 스스로에 대한 자학을 반복하지만, 이 와중에도 세속이성과는 아무런 존재론적 연속성을 지니지 않은 새로운 계열이 활짝 열릴 수 있다. 가령 조화로운 차이를 발생케 하는 유출(emanation), 새로운 세대들이 감행하는 탈출, 빗금선(diagonal)을 따르는 상승, 평화로운 탈주를 위한 경로 등...
_제12장 “다른 도성: 신학은 하나의 사회과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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