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절 또는 한 세상이 지워져 간다고 했다. 그럴 때가 되어서야 나는 뒤늦게 궁금해 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하지만 그건 던지기보다는 받아야 할 질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또는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불길 속에서 사람들이 떨어져내리던 상가 옥상 망루에서,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오늘처럼 솟기만 하던 고층 건물들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윤성희(사진가), 한 시절 또는 한 세상이 지워져 간다고 했다」중에서
부스럭거리며 그는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못 본 척 돌아서려는 내게 그는 또 다른 자두 한 알을 건넸다. 늙은 손이 쥐고 있던 푸른 자두는 더 없이 싱싱해보였다. 무릎에 쓱쓱 자두알을 닦아 권하는 그의 몸짓이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나는 얼결에 그 자두를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자두 철이 오려면 아직 한참인데 올해는 자두를 맛보는 것으로 새해를 맞는구나, 생각하며 그를 따라 자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푸른 자두. 그것은 청량리의 노신사가 폐쇄된 자기 세계에 입회를 허용하는 상징과 같았다.
---「장혜령(시인), 청량리」중에서
분당수서간 고속화도로 서쪽의 판교지역 고층아파트단지 뒤편 송현공원 한 쪽에는 ㅤ'동간마을 모향비'라는 비석이 서 있다. 동간마을은 이 지역이 신도시로 개발되기 전에 있던 마을이었다. 비석에는 아마도 적절한 토지 보상을 받고 마을을 떠났을 원주민들이, 이제는 사라질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히 적혀 있다. 하지만 지금 송현공원에 세워져 있는 공원 안내판에 동간마을 모향비라는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예전에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당연한 사실이 무시되고 잊혀져 있는 것이다.
---「김시덕(문헌학자), 성남, 세 도시 이야기」중에서
애들 교육 때문에 그러느냐, 어느 동네나 살다보면 정든다, 아직 사는 게 어렵지 않구나 등등 주변에서 별의별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목동에 남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살던 데서 살고 싶어서다. 어차피 학원비가 너무 비싸서 목동 학원은 그림의 떡이었다. 학원보다 귀한 자원이 있었다. 급하게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묵은 관계, 날선 신경을 누그러지게 하는 오랜 나무 내음, 그리고 삶의 피로에 지치기 이전 과거의 내가 목동엔 살고 있었다. 과거의 나는 단지 어귀에선가 걸어나와 지금의 나에게 말하곤 했다. “지난 십년 무탈하게 살았으니까 앞으로 십년은 힘들어도 견뎌보아. 조금 더 기운을 내렴.”
---「은유(작가), 나의 살던 고향 목동을 기억하며」중에서
내게 예전 집은 물리적으로는 전혀 사라질 거 같지 않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기억이 계속해서 이전 기억을 뒤덮고, 지금 이 순간 소중한 공간에 대한 마음이 커가기 때문이다. 사실 그 집은 마음을 앓기에 좋은 장소였다기보단, 마음 놓고 앓을 수 있던 유일한 장소였기에 애착이 간다는 게 맞는 거 같다.
---「백세희(작가), 카스테라 모양을 한 나의 가난」중에서
나는 [군산]의 외관상 쉬이 끄집어낼 수 있는 '지역 혹은 지방의 정취(靜趣)'라는 용어로 작품 속 분위기를 몰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이 고요하고 정적인 영화에서 외려 무수한 데이터가 산출(算出)되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 느낌은 내 영화 체험과 결부된 채 더욱 짙어졌다. 일정한 다운로드 비용을 지불하고, 파일이 저장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으며 버튼으로 동영상재생플레이어에 나타난 화면 크기를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영화는 내게 다종다양한 데이터로 다가왔다.
---「김신식(감정사회학 연구자), 디스로케이션」중에서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그토록 기다리던 재건축이 허가되었다. 상계 주공 8단지가 그 시작이었고 새로 들어설 아파트의 이름은 '노원꿈에그린'. 어떤 이들의 생존을 폭력적으로 밀어내면서까지 꿈꿨던 풍경이 궁금해졌다. 누구도 의심치 않았던 1988년의 미래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중랑천을 중심으로 상계 주공 아파트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미래를 상상하면서.
---「홍진훤(사진가), [waterfall] 작가 노트」중에서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더욱이 사진을 통해 그 것을 말하고자 함은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는 성주의 여섯 밤 동안 사람들은 추위에 떨었고, 응급 후송되기도 했다. 여러 밤을 지새우며 나는 그 옛날 평택의 대추리를 생각했고, 사라지지 않는 장면들이 떠올랐다. 군산의 기지를 찾아가게 되었고, 여전히 확장 중인 기지 앞 아무도 없는 빈 집 앞에서 도대체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를 묻곤 했다.
---「이재각(사진가), 여섯 번의 밤들, 사라진 말들」중에서
디지털 이미지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미지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가 위기에 처해졌다고들 말하지만, 정작 오늘날 우리는 그 자체로 모종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무수한 얼굴의 이미지들로 둘러싸여 있다. 카메라 왼편이나 오른편 아래로 비스듬히 시선을 던지면서 사색에 잠긴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작가의 흑백 프로필 사진 쯤은 이미 진부하게 여겨질 지경이고, 이제는 개나 고양이도 사진적 이미지 속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인간적' 표정을 과시하는 시대다. 그렇다면 얼굴과 관련해서, 기술적 이미지를 다루는 동시대 작가들의 임무란 일단 '그저 하나의 얼굴'을 재발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유운성(영화평론가), 그저 하나의 얼굴」중에서
형태와 장면을 연구하거나 이미지를 축약해서 복제하는 수단으로서, 드로잉은 주어진 시각 데이터를 해석하여 유의미한 정보의 구조를 구축했다. 반면 사진술은 무분별하게 빛을 포착하고 저장하는 기술이었다. 최초의 사진들은 빛의 밝고 어두움만을 기록했는데, 이는 초기 사진술이 색채를 포착하는 능력을 결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빛이 색채를 결여했기 때문이었다. 자연에는 색채가 없다. 또는 적어도, 인간을 배제한 자연에는 인간이 아는 색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진의 첫번째 의미였다.
---「윤원화(시각문화 연구자), 색채 없는 시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