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에서는 츠빙글리, 루터, 부처의 세례신학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제1세대 종교개혁자들로서 다음 세대의 개혁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미 앞 장에서 다음을 살펴보았다.
첫째, 로마 가톨릭, 재세례파와 행한 토론에서 성례의 합법성과 효능성 사이를 구분하는 것과, 성례의 올바른 집례와 기독교인의 삶을 위한 유용성을 구분했다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었다.
둘째, 역사적인 배경은 무엇이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이었는가를 정확히 분류하는 데 결정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루터가 1520년에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성례들이 가지고 있던 효능의 상태에 관해 로마교회와 논쟁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1530년에 재세례파와 다른 과격한 개혁자들과 무엇이 성례를 합법적이게 하는가를 논쟁했다. 효능성과 합법성에 관한 유사한 논쟁이 츠빙글리와 부처, 두 사람의 세례신학에서 나타났다.
셋째, 성례신학을 살핌에 있어서 구분되지만 모순되지 않는 두 개의 방법, 특별히 세례신학을 살펴보았다. 루터는 하나님의 용서의 약속이 그 외부적 표시에 나타났다고 하는 표징-약속 신학표징-약속신학(sign-promise theology)을 선호했다. 이에 반해 재세례파와 직접적인 접촉을 했던 츠빙글리와 부처는 언약 세례신학(covenant baptismal theology)을 선호했다. 그것은 구약언약의 자녀들을 위했던 것처럼 또한 신약의 자녀들에게도 해당된다.
넷째, 거기에는 성례들과 성례들의 정의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성에 관한 토론이 있었다. 성례를 집례 하는데 있어서 신실한 수용 혹은 적어도 공적으로 충성스러운 수용은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이 장은 두 개의 키, 제2세대 종교개혁자들에게 눈을 돌리고자 한다. 그들은 츠빙글리와 부처를 따라 개혁주의 전통의 상류에 서있다. 첫째로는 하인리히 불링거(1504-75)의 세례사상을 연구하며, 둘째로는 존 칼빈(1509-64)의 세례신학를 연구하고자 한다. --- pp.91-92
현대 예배갱신운동은 그 원형을 교부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인의 입회 모델에 따른 세례 성례전을 의도했다. 제2차 바티서공의회는 이 모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972년 로마 가톨릭교회는 “기독교 성인 입교예식”을 출판했다. 이 예전의 변화를 주도했던 학문은 많은 미국 구(? 계열의 개신교회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예배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예배갱신운동과 “기독교 성인 입교예식”에 영향을 주었던 신학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은, 신학이 필수적으로 그 예식을 채용한 어떤 전통과 조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안했다. 서론의 마지막 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루터교 예배서』가 세례의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제시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전통을 평가하기 위하여 필요한 역사적-신학적인 작업을 세부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도전이다.
제1장에서 제1세대 종교개혁자들인 츠빙글리, 루터 그리고 부처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몇 개의 교훈을 얻었다. 첫째, 처음부터 다양한 신학적 입장이 있었다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성례신학과 세례신학을 적절히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둘째, 적법한(valid) 세례와 유효한(efficacious) 세례 사이의 구별은 다양한 환경 속에서 세례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을 바로 이해하는 열쇠이다. 셋째, 루터가 표징에 부착되어 있는 하나님의 용서의 약속을 언급함으로써 세례의 적법성을 주장한 반면에, 츠빙글리와 부처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신 은혜의 언약을 언급함으로써 같은 관점을 갖고 있었다.
제2장에서는 제2세대 개혁주의 신학자들인 불링거와 칼빈을 살펴보았다. 불링거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어 확장된 은혜의 언약을 주장했다. 이 언약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반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할례는 언약을 취하는 표징이었다. 불링거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이 은혜의 언약으로 선택 받은 자들을 예정하셨다고 생각했을 때에, 개인적 신앙고백 그리고 언약으로부터 나오는 살아있는 권리가 선택 받은 자들 가운데 충분한 표징이었다는 것을 더욱 실제적이라고 생각했다.
칼빈은 마틴 부처로부터 배우고 지역 회중 목회자로서 봉사하면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시간을 보냈을 때 그의 원래의 표징-언약 신학은 좀 더 발전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그는 교회규칙(church order), 권징, 유아세례에 대한 재세례파의 도전에 직면했다. 그의 성례신학과 세례신학이 그랬던 것처럼, 가견적 교회에 관한 그의 견해들은 확장되었다. 1545년 『제네바 신앙교육서』(Geneva Catechism) 발행 즈음에, 그는 루터의 표징-약속 신학, 그리고 세례의 공적 서약관점에 있어서 츠빙글리의 관심을 결합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세례의 통합된 신학을 벼웠다. 유아세례의 길고 명료한 언약방어는 스트라스부르크 목회기간, 그리고 선택과 가견적이며 불가견적인 교회로 입회하는 것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에 발전했다.
제3장에서 칼빈의 세례신학은 내적 긴장을 가졌던 다양한 요소들을 유지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많은 2차 문헌에 반하여, 칼빈의 선택 개념은 이러한 내적인 긴장 속의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1) 세례의 적법성에 관한 문제와 함께 선택의 결합에 있어서 (2) 선택과 유아세례, 그리고 언약에서 이미 유아들을 위한 집례의 순간에 세례가 어떻게 효과적인가 하는 의문의 결합과 함께 어려움이 놓여 있다.
제4장에서 이제 종교개혁의 제2세대 이후 개혁주의 세례사상의 궤도를 규명하고자 한다. 제1절에서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을 다룬다. 제2절에서 개혁주의 정통주의로 연구 방향을 돌린다. 제3절에서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세례신학을 연구한다. 마지막 4절에서는 20세기로부터 토론되고 있는 개혁주의 세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 pp.177-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