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도 저런 집에 살면 행복할 텐데….
- 내가 누구만큼 돈을 벌면 난 죽는 시늉이라도 할 텐데….
- 우리 아이가 옆집 누구처럼만 바르게 자라면 예뻐할 텐데….
이런 말들 속에는 나에게 주어진 현재라는 선물은 ‘마지못해 사는 생지옥’이라는 자기암시가 강하게 깔려 있다. 이러한 자기암시는 그들 내면의 잠재의식으로까지 내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런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래는 우리가 밟고 있는 현재라는 기반 위에서만 존재하는데, 그들은 현재를 놓치고 있기에 다가올 미래도 허망하기만 하다.
세상에는 ‘화가 날 일’이 따로 있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틀(관념, 생각, 가치관, 습성) 때문에 어떤 일에 ‘화’라는 감정을 투영하는 것이다. ‘내가 틀 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화는 없어진다.
그렇다. 세상에는 슬픈 일, 기쁜 일, 즐거운 일, 화날 일, 섭섭한 일이 따로 있지 않다. 오직 ‘일’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는 그 ‘일’에 슬픔의 옷을 입히고, 누구는 기쁨의 옷을 입힌다. 그러니 이왕이면 그 일에 ‘화’, ‘슬픔’, ‘우울’ 같은 감정의 옷보다는, ‘기쁨’, ‘재미’, ‘즐거움’의 옷을 입히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관계성에 있어서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각자의 렌즈로 바라보는 것이다. 또 그것을 마치 사실인양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련의 행위다.
예전 회사에서 만난 J씨는 ‘안 하려고’ 인재의 대명사였다. 전임일 때는 무슨 일만 시키면, ‘전임 나부랭이가 그런 일을 어떻게 해요?’라며 내빼기 일쑤였고 선임이 되었을 때도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내가 퇴사하고 요즘 J씨는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보니, 과장인데도 여전히 ‘과장이 무슨 권한이 있어 그런 일을 하느냐?’로 발뺌하고 있다고 한다. J씨가 일을 안 하려고 하는 이유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여행이 진정 소중한 것은 돌아갈 일상이 있기 때문이다. 돌아갈 고향과 일상이 없는 여행이라면 조금 서글프다. 일주일만이지만 다시 돌아온 일상은 그 전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익숙함’이라는 것은 그래서 무섭다.
그동안 내가 관념으로만 본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삶이 신비와 경이로움으로 다시 다가온다. 물론 얼마 못 가서 다시금 익숙함과 관념의 세계로 빠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행 뒤의 이런 순간이 주는 기쁜 황홀감 때문에 나는 기꺼이 다음 여행을 기대한다.
모두 소소한 행복들에 대해 자주 생각했으면 좋겠다. 행복의 민감도가 훨씬 더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복들이 그렇게 먼 곳에 있지 않음을 저절로 느낄 것이다. 오늘 잠시 시간을 내어 당신의 소소한 행복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는 것은 어떤가?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자기 사색의 공간에서도 남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은 좀 서글프다. 비밀의 공간에서는 자기만의 색깔로 상상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떨림을 발견하고 행복을 꿈꾸고 설렘과 감동을 느껴 보자.
첫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6개월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삶과 현실의 그것과의 괴리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삶에 지쳐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지 몰라 두려웠다. 이런 하루들이 내 인생의 적나라한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삶의 의미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나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서른이 넘도록 이런 질문들을 진지하게 물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또 부끄러웠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하고 싶은지, 도대체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집으로 와서 내 책상에 앉았을 때, 나는 감사함과 미안함과 함께 자리했다. 우선 이렇게 밖에 다치지 않았던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늘 아무렇지도 않게 잘 운전하고 다녔던 모든 평범한 일상들이 얼마나 큰 하늘의 선물인지 알게 되었다.
오늘 셋째 아이의 감기가 심해 집사람은 아이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아침에는 아이가 아픈 것에 마음이 쓰였고 조금의 갑갑함도 있었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오늘은 내 인생 중 가장 감사한 하루였다. 조수석 자리의 충격이 가장 컸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큰 일이 날 수도 있었다. 어떻게 감사하지 않겠는가?
- 무슨 일이니? 왜 이렇게 힘이 없어?
- 엄마! 형제 돼지 한 마리가 없어졌어요!
- 뭐라고! 형제 돼지 한마리가 없어졌다고?
이윽고 엄마는 형제 돼지들을 모두 일렬로 정렬 시킨 뒤,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고, 한 마리씩 세? 나간다.
- 하나, 둘, 셋, …, 아홉, 열.
그제야 엄마 돼지는 사태를 파악한 듯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아기 돼지들을 안심시켰다. 새끼 돼지들은 모두 자기를 제외하고 숫자를 센 것이다.
우리의 행복이 그렇지 않을까? 늘 있어온 행복인데, 우리는 그 행복을 찾아서 온 산을 헤매고 다닌다. 바로 가까이 있는데, 알아차리지 못하고 잃어버린 행복을 찾는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늘 있어온 행복을 전혀 음미하지 못한다. 뭘 더 갖춰야 되는 줄 알고, 돈도 벌어보고, 지위도 올려보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행복해지기 위해서 뭔가를 더 해야 할 것은 없는 것 같다. 늘 옆에 있는데 뭘 더 한다는 것인가? 공기처럼 행복은 늘 우리 곁에 있기에 오히려 뭔가 하려는 맘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