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스로의 영혼을 하루에 0.35밀리미터씩 밖으로 밀어내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야. 영혼에 새겨진 모든 걸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슬픔이든, 악몽이든, 기쁨이나 추억 같은 것들도 너무 무거워지면 인간을 짓눌러버리거든. 어쩔 수 없이 하루에 그만큼씩은 자신을 머리카락에 적셔서 밀어내야 해.”
처음 엄마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이불 위에 앉아 미미인형의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엄마는 콜드크림으로 화장을 지우며 거울을 보고 그렇게 중얼거렸었다. 아마도 내게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섯 살이었던 나는 이상하게도 그 말을 한 마디도 빠짐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니? 머리카락은 그 사람에게 담갔다가 꺼내는 실타래라서 한 번 손끝으로 만져보면 알 수가 있지. 바닷물에 담갔던 것과 오렌지 주스에 담갔던 것은 다르지 않겠니? 머리카락은 모든 것을 말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 외면하고 있는 것, 앞으로 일어날 것 모두를.”---p.30, 카레의 시절과 밥의 시절
“나, 사실 리에를 좋아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알겠어요.”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길고 숱 많은 속눈썹을 두어 번 깜박였다.
“끔찍이 사랑하던 남편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나서 리에가 조금 이상해졌어요. 가끔씩 저렇게 큰 여행가방을 들고, 코우지의 손을 끌고 어디론가 가거든요. 정말 떠나는 건 아니에요. 사실은, 내가 열 번도 넘게 몰래 따라가 봐서 알아요. 그냥…, 기차역에 한동안 앉아 있다 오는 거예요.”
심장의 한쪽 솔기가 두두둑,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기차역으로 가기 전에 꼭 우리 가게에 들러주거든요. 줄 건 맛없는 카레밖에 없는데, 내 앞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그릇을 다 먹어주는 게, 그게 너무 고마운 거예요. 그러니까, 리에가, 카레를, 밥이랑 뒤섞지도 않고, 허물어뜨리지도 않고 조심조심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녀가 묘하게 균형이 무너져 있는 나를, 바로 잡지 않고 온전히 구석구석 안아주는 것 같아서, 그냥 위잉 소리가 나면서 멍해져요. 언제 다시 와줄지 모르기 때문에 6년 전부터 하루도 가게 문을 닫은 적이 없어요. 행여 리에가 카레를 먹지 않고 그냥 돌아가면 안 되니까….”
모두가 천천히 숨 쉬듯 살아가는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란 건 없었다. 이곳에서 쉬고 있던 건 뜨내기인 나뿐이었다.---p.48, 기차역에 간다고 해서 모두 떠나는 건 아니에요.
사람의 일이란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 나도 그랬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내가 이미 나여서,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었다. 20층에서 떨어진 고양이가 5층쯤에서 떨어진 고양이보다 부상당할 확률이 훨씬 적다. 고양이가 ‘추락’을 알아차리고 뭔가를 예비할 수 있는 높이는 8층 정도부터이기 때문이다. 스프링 같은 속 근육과 나긋나긋한 발바닥의 에어쿠션을 사용할 수 있으려면, 우선 내던져진 자신의 처지를 알아차릴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걸 해볼 시간이. 하지만 삶은 그렇게 시작되지 않는다. 고양이의 삶도, 인간의 삶도. 신들은 고양이들을 반드시 7층에서 던진다.
삶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아차릴 때쯤이면 이미 고양이는 호되게 아스팔트에 부딪힌 뒤다. 부러질 곳은 부러지고, 피가 흘러야 할 곳에선 피가 흐르고 있다. 정신 차리고 절룩거리며 이제부터 감당해야 하는 몫의 고통을 알아차릴 때쯤, 흥미롭게 고양이의 추락을 지켜보던 신들과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묻는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p.67, 신들은 고양이들을 반드시 7층에서 던진다.
마지막 대사가 끝났고, 대본에 코를 박고 있던 미루가 얼굴을 들었고, 모두가 그곳에 앉아 있는 프랑수아즈 사강을 보았다. ‘상대역이 없으면 우린 어떤 것도 될 수가 없어. 누군가가 되쏘아주어야만 ‘그것’이 되지….’ 맞은 편 거울 벽에 등을 대고 앉아 대사를 연습하던 요시히로의 입술 경계선이 가파르게 흔들렸고, 란의 머리 위에 늘 홀로그램처럼 얹혀 있던 백조의 왕관이 사라졌다. 얇은 피부의 하루히는 강휘의 어깨에 관자놀이를 갖다 댔다. 마유코의 동그란 눈이 우리 방의 창문처럼 크게 열렸다. 그리고 용재의 얼굴. 그 얼굴이 밤 웅덩이처럼 까맣게 깊어졌다. 그리고 반짝이는 아픔 같은 것이 반딧불이처럼 그의 이마와 뺨과 입술 위로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안타까움도, 두려움도 아닌 그 날벌레들은 위험하고 낯선 세상의 냄새를 풍겼다.
단원들은 그 순간, 또 하나의 커다란 ‘달의 룰’ 덩어리를, 각자의 방식대로 소리 내지 않고 꿀꺽 삼키고 있었다.---p.119, 류짱, 진짜 공연을 해보고 싶지 않아?
나는 울음을 터뜨렸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첫 전장에서 처음으로 적군의 목을 베고 솟구치는 피를 보며 울부짖는 소년병처럼, 내가 조금 전에 누군가를 깊숙이 찌르고 저지른 엄청난 무언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막 나를 뚫고 나온 낯선 그것은 빠른 속도로 나를 뒤덮을 것이다. 무엇보다, 격렬한 기쁨에 전율하는 내가 두려웠다. 난 고통스러울 만큼 그 순간에 몰입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감정의 수위를 이토록 높이는 것은 자해에 가까웠다. ‘이런 식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는 안 되었다.---p.134, 사냥당한 짐승처럼 피를 흘릴 수만 있다면.
“이미 완전한 사람은 플레이를 원하지 않아. 누군가를 사랑할 필요도 없지. 심장 끝을 태우는 갈망, 가질 수 없는 마지막 조각이 이 게임을 계속하게 하는 거야. 몸부림 치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결국 마지막 장면까지 살아 있게 하는 거라구. 그게 마음에 안 들어? 그것보다는 더 따뜻한 이유를 찾고 싶겠지? 애정이나 연민이라고 말하고 싶니? 아니야, 아니야!
우리가 하는 일은 그 갈망을 더 뚜렷하게, 더 강하게 색을 입혀주는 것뿐이야. 뻗으면 손에 닿을 듯 생생하게, 바로 눈앞에서, 딱 거기까지만! 거의 다 잡았던 월척을 놓친 어부는 절대로 바다를 떠나지 않아.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그 마지막 조각을 들고 와서는 덜컥 맞춰 넣어버린다면? 에너지가 제로에 달해. 게임은 맥이 빠지고, 그러면 반드시 누군가는 판을 떠나게 되어 있지.”---p.163, 뮤토들은 종종 착각을 하지
“이렇게 거리에 서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아이가 어디선가 이 노래 소리를 듣겠지. 그리고 엄마가 가까이에 있다는 걸 알겠지. 그리고 울음을 그치겠지. 날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그 아이가 따뜻하게 느끼면 돼. 외롭지 않으면 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일 뿐인데…. 그걸 가지려고 애쓰니까…, 슬프겠지.”---p.176, 이 모든 사소하고 부질없는 불행들
“하지만 먼저 네 이야기를 해봐. 거짓말이든, 정말이든, 네가 믿고 있는 이야기를 하면 돼. 이 마을에선 다 똑같으니까. 아니, 오히려 거짓말 쪽이 더 힘이 세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더 진실하게 믿고 있는 쪽이 현실이야. 너는 왜 그렇게 창백하니?”---p.189, 운명의 눈금이 0을 가리킬 때
이곳에선 누구도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이상하리만치 이 마을엔 거울이 없다. 하지만 나처럼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는 듯했다. 내가 이 역에 내리던 날을 잊은 것처럼, 나는 거울을 보던 기억을 잊었다.
우리는 그저 보이는 대로 서로의 모습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풍경도 보았다. 그 속에 내 모습이 있었다. 텅 빈 바닷가의 모래 속에서, 벤치에 앉아 있는 리에의 뒷모습에서, 카레의 들척지근한 카레국물 위에서 어룽어룽한 그림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면 그만이었다.
스스로의 모습에 집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무치는 기억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적당히 거짓말을 하고, 그러니까 용서할 것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p.229, 거울이 있던 자리
“실은, 이 머리카락, 제 것이 아니에요.”
네코마마는 웃었다.
“오, 그래? 그럼 누구 것이지?”
이 머리카락들을 0.35밀리미터씩 밀어낸 것은 나의 영혼이 아니다. 나의 기억들이 아니다. 낯선 이들의 삶 속에 박힌 갈망과 결핍의 순간들, 달빛 속에서 미나 선생님이 써준 대사들, 10초 정도 지속되는 거울 속 완벽한 세상의 것이다.
“팔아버렸거든요, 다…. 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에….”---p.240, 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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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가루]
거의 언제나 여자는 남자보다 똑똑하다. 여자들은 자신이 버진virgin인지 아닌지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남자들은 스스로 버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여자’가 어느 날 나타나 가르쳐주기 전에는. 꼭 엄마가 아니더라도 열여섯만 되면 여자는 마흔다섯 살짜리 남자를 가르칠 수 있다.---p.257, 나는 언제나 여자들이 두렵다,키스하기 전까지는
헐렁한 진을 골반에 걸쳐 입고 야구모자를 눌러 쓴 개구쟁이 남자가 2002년 내가 있던 빌리지를 방문했을 때, 나는 아파트 층계에서 굴러 떨어지듯 단번에 그를 좋아해버렸다. 멋지지 않았다. 전혀. 하지만 ‘기다렸다’라고밖엔 말할 수 없는 절박함으로, 나는 그가 서 있는 층계 끄트머리를 향해 정신없이 굴러가고 있었다.---p.264, 네가 바라던 그 여자가 아닌 걸 알아.
기다려야만 오는 것들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없이 살겠다. 그것들은 오만하고, 애를 태우며, 애써 가치를 인정하게 만들고, 날 늙게 한다. 내가 즐거이 기뻐하며 맞이하는 미래들은, 그리고 그들의 어버이 세포인 오늘들은, 충분히 헐겁고도 양순한 얼개로 내 앞에 심심하게 뒹굴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절대로, 나 죽을 때까지 그럴지어다.---p.269, 결혼보단 좀 더 그럴듯한 얘기를 해봐.
그가 그리웠다. 그를 처음 만나기 훨씬 전부터. 글쎄…. 서로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는 말, 19세기 이후엔 사용된 적이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것 말고 다른 식으로 사랑에 빠질 수는 없다. 나는 그와 마주쳤고 사랑하게 되었다.
흔히들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이나 ‘순수했던 학창시절’이 그립다고 말한다. 나는 이상하게도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해 보거나 아쉬워했던 적이 없다. 어린 시절은 차라리 고행과도 같았다. 유치한 만큼 처절한 고뇌로 가득 차 있었고, 손끝발끝에서 핏기가 다 가셔 저릿저릿해지도록 울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에게만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맞이한 학창시절은 고스란히 순수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허락된 시간과 범죄가 단 하나도 없었으므로. 언제나 ‘지금’이 ‘아까’보다 훨씬 좋았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씩 늘어나는 것도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돌연변이 마음은 눈이 뒤에 달린 고양이처럼 언제나 미래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미래의 모든 그리움을 끌어안고 그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너무 놀라서 피가 푸르게 변하는 순간을 맛봐야 했다. 돌연변이의 대가, 치렀으니 이만 용서해줘.---p.285, 이것 말고 다른 식으로 사랑에 빠질 수는 없다.
초보 마이미스트들이 연습용으로 하는 ‘사과 깎기’라는 게 있어. 사과를 들고 깎는 걸 연기하는 거지. 물론 사과와 칼 없이. 어느 날 내가 열심히 그 사과를 깎고 있는데 그 선배가 날 부르더군. ‘어이, 노무라, 사과 다 깎았으면 이리 좀 와봐.’ ‘옛!’ 하고 내가 후닥닥 일어서는데 ‘어이, 어이…. 사과껍질은 치우고 와야지!’ 하는 거야. 그 선배의 말은 이랬어. 마임의 핵심은‘여기 사과가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사과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그러고 보니 나는, 망각은 기억보다 위대한 창조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선배의 말이 맞았다면, 저기 긴 머리 여자도 언젠가 자기 손 안에 들고 있던 사과를 깎고 있는 거다. 연붉은 사과껍질이 그녀의 무릎 위로 떨어진다. 사과의 기억은 사과의 부재보다 강하다.---p.369, 4시 반의 사과 깎기 인형
나는 이 스시 바의 주방장 후지와라 유이치다. 오늘도 라라가 아무것도 부족함 없는 얼굴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카운터 자리에 앉는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잘 안다. 내가 일곱 살 때 나를 가장 귀여워하던 큰 누나가 장염으로 죽고 나서 거의 1년 동안 “누나, 오줌 마려워.”, “누나, 감 깎아줘.”, “누나, 내 노란 바지 어디 있어?” 하며 지냈던 기억이 있다. 정말 그 누군가는 죽는다고 해서 없어져지지가 않는 것이다. 마음으로 의지하던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p.383, 넷이서 눈을 뜨고 숨바꼭질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