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망가지고 가족이 죽고 농사가 파괴되었을 때,
욥은 땅바닥에 무릎 꿇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왜요, 하느님? 왜 저입니까?”
그러자 하느님이 우레와 같이 답하셨다.
“난 네가 그냥 좀 짜증나.”
―스티븐 킹(소설가)---p.5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
그렇게 간단하면 좋았게? 하느님 적임자로 뽑힌 이는 막판에 자리를 고사했다. 가족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게 이유였지만, 자리가 마뜩치 않아 변심했다는 것을 알 만한 이들은 다 알았다. 그를 탓할 수만도 없었다. 지구는 위치부터 나빴다. 발길이 닿지 않는 우주의 후미지고 누추한 구석에 있었다. 고용시장이 활황일 때는, 검증 안 된 작은 행성을 맡겠다는 수준급 후보자를 찾기 어려웠다. 골치 아픈 창조 업무까지 끼어 있을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창조는 제대로 하려면 머리 깨지는 일이었다.
채용공고를 냈지만 찾아온 후보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것도 대부분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었거나, 그도 아니면 조건이 너무 딸려서 면접심사에 끼지도 못했다. 그중 쓸 만한 지원자가 ‘후보자 B’로 알려진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중간관리자급에서 단조롭지만 알찬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위원들 앞에서 자신의 자격을 피력했다. 하지만 그의 조용하고 어딘지 상투적인 태도는 선뜻 확신을 주는 데 실패했다. 위원회는 합의를 보지 못했다.
재깍재깍 시간이 흘렀다. 시한이 임박했고 위원회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사무관은 뒤끝 쩌는 이혼 중이어서 정신이 없었고, 지구 운영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전담팀은 다른 프로젝트들로 바빴다. 마감 날이 됐지만 하느님 자리는 여전히 공석이었다. 다들 성질이 났고 머리는 안 돌아갔다. 그러다 결국 위원 한 명이 포커게임에서 지구 하느님 자리를 내걸었고, 게임의 승자는 그 자리를 자신의 무능한 10대 아들, 밥에게 잽싸게 넘겼다. ---pp.15-16
미스터 B는 안경을 훌러덩 벗었다. 그의 두 눈이 참아지지 않는 분노로 번득였다.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말해줄까? 플로리다에만 홍수로 이재민이 400만 명 발생했고, 수단에서는 물이 없어서 500만 명이 죽어가고 있어. 대략적인 숫자가 그래. 아주 대략적이지. 그래서 행여나 네가 두 가지 일을 홀라당 바꿔 한 건 아닌지 정말로 궁금해.”
녀석이 얼굴을 돌렸다. 얼굴에 거룩한 고통이 어렸다.
“내 탓이 아녜요. 아저씨 글씨는 읽기 어려워요. 그리고 내가 글자를 뒤죽박죽 읽는 거 알잖아요. 문/곰, 수산시장/수사반장. 그런 병이 있어요. 난동증.”
미스터 B는 한숨을 지었다.
“이게 문/곰이니? 이게 수산시장이야? 아-메-리-카. 아-프-리-카. 거기다 이번에는 차이를 설명해준 걸로 아는데? 난독증 환자도 이해하게끔? 그런데 귀담아 듣지 않은 게 누구지? 그게 누굴까?”
그는 손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안 그러면 정말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하느님이 귀찮다는 듯 눈알을 굴렸다. “미안해요.”
미스터 B는 심호흡을 하며 손가락으로 책상의 나무 무늬를 두드렸다.
“자, 잘 들어. 설명해줄게. ‘미안하다’라는 단어는 뉘우침, 회한, 죄책감 등의 개념을 내포해. 지금 맥락상 아주 적절하게 사용됐어. 그런데 말이야, 이상한 건, 네 말에서 죄책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야. 솔직히 말해 난 네가 세상이 단숨에 망하거나 말거나 개뿔 관심 없고, 그저 금주의 대포알 가슴 헤픈녀와 한 건 올릴 생각만 한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어.”
그 누가 아니라고 하랴. 밥은 세상을 창조하자마자 마음이 떴다. 하느님 자리에 앉은 지 달랑 2주 만에 잠만 퍼 자고 뺀질대면서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없는 세상 취급했다.
녀석은 온 인류에게 저주와 증오를 받아 마땅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녀석이 아주 영리한 밑밥을 깔아놨기 때문이다. 밥은 살인자와 순교자와 깡패 들로 가득한 종족을 설계하면서 그들 안에 자신을 숭배하는 성향을 붙박이로 박아놓았다. 그럴 때 보면 녀석에게 혀를 휘두르게 된다. 비록 돌대가리지만, 어쩌다 한번 신통한 꾀가 번득이면, 그때는 눈이 멀 만큼 강렬한 빛을 낸다. ---pp.59-61
탄원은 무한대로 겁나게 쌓여가고, 미스터 B가 개입할 수 있는 기적은 눈물 나게 적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Cancer(암). Concentration camps(강제수용소). Congo(콩고). 거기에다 유럽 이민자에 의한 착취, 토착민 말살, 반군과 내전, 선거부정, 부패정부, 기아, 질병, 환경위기. 그리고 강간. 아흔 살 할머니들. 생후 1개월짜리 아기들. 매일 새로운 위기, 새로운 학살. 매일 멸종되는 생물들. 새로 생기는 병들.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 기상이변.
달랑 엿새 만에 얼렁뚱땅 창조된 세상에서 뭘 바라겠는가.
아주 창의적이기는 했다. 다만 하나쿇나 뜯어고치는 것은 늘 미스터 B의 몫이었다. 날마다 엉킨 실타래를 붙들고 한 올 한 올 이리 풀고 저리 끄르고, 어르고 달래가며 고쳐놔야 했다.
미스터 B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꼴을 보라. 권력을 잡았을 때는 폭력적이고 이기적이고 무자비하기 이를 데 없고, 그렇지 못할 때는 착취당하고 병들어 있고 비참하기 짝이 없다. 한편으로는 노예제도와 전쟁과 종교재판과 인종청소를 자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셰익스피어를 읊고 초콜릿을 만들고 타지마할을 짓는다. 웃기는 균형이다.
고래들. 미스터 B는 국제포경위원회 강령 요약본을 꺼내 훑어보면서 규제포획과 해양오염에 이의를 제기하는 청원들을 검토했다. ‘규제포획’이라. ‘잡아 죽이기’를 에둘러 말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최근의 위기는 오염이었다. 제초제와 살균제와 살충제가 한데 섞인 막강 유독물이 지하수와 바다를 오염시켰고, 살아남은 고래들은 살 만한 물을 찾아서, 예전의 안전하고 쾌적했던 바다를 찾아서 점점 더 다급하게 지구를 뱅뱅 돌았다.
아아, 고래들. 미스터 B는 생각했다. 가엾은 고래들.
그는 폴더들과 상자들, 책상에 붙은 포스트잇 메모들과 천장까지 쌓여 있는 색색의 파일 더미, 그리고 하도 오래돼서 고대 유물보다 더 유물 같아 보이는 ‘할 일 명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떠나기 전에 이것들을 다 해결할 수 있을까?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불가능하다. 하지만 최후의 안간힘을 쓰기로 했다. 이 출구 없는 미로와 영원히 작별을 고하기 전에, 어떻게든 고래들의 안전만은 확보하리라 다짐했다.
---pp.9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