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나 조경과 같은 공간 환경을 다루는 분야와 커뮤니티 디자인이나 마을만들기 같은 커뮤니티 중심 프로젝트는 실천적인 작업의 성격상 늘 현장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정작 개별 프로젝트의 실현 과정을 꼼꼼하게 다룬 사례가 드물다는 점도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최대한 가감 없이 우리의 구체적인 사례를 기반으로 하여, 하나의 프로젝트가 여러 방식으로 중재되고 진화되는 프로세스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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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많은 행정가들은 가시적인 성과를 통해 무언가 차별화된 결과물을 원한다. 특히 외형적인 차별화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가장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예산을 투자해서 새롭게 정비한 지역일수록 좋아졌다는 느낌을 주기보다 정체불명의 요란한 디자인들의 각축전인 경우가 많다. 지역 공공건축물을 만드는 일은 형태적·표면적으로 상징성을 표현하기보다 지역적 특수성에 맞는 프로세스를 통해 이용성과 정체성이 발현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더 필요하다. 형태적 차별화보다는 과정적 차별화가 더 중요하다. 우리들의 선진사례지 답사는 증거로 남길 수 있는 사진 찍기에 더욱 분주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선진사례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보이지 않는 과정에 대한 ‘공부’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다. 철새마을 프로젝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우리에게 맞는 프로세스를 디자인할 수 있는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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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렇게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건물 하나 만들기 위해 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필요가 있냐고. 아마도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공공건축물이 실패한다고. 건축물이 물리적으로 지어지기 전에 커뮤니티가 건축된다는 사실, 건축물이 커뮤니티를 생성하는 매개체가 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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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강자들이 일으킨다. 약자가 문제를 일으킨 경우는 드물고 그래봐야 사소하다. 경제적 양극화는 가진 자들이 더 가지려고 발악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학교에서의 왕따와 폭력과 차별은 사회적 양극화와 차별을 재생산하기 위해 강자들이 연합하여 만들어낸 경쟁과 공포의 체제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차별과 빈곤과 무시는 지역적으로 농촌으로 상징되는 공간을 바닥에 깔고 세계무역이라는 전혀 불가피하지 않은 채널을 통해 전세계의 모순과 연결된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60년째 이어져오고 있는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한꺼풀 덧씌워져 강자들의 연합에 종교적 신념까지 가세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가진 자의 못가진 자에 대한 지배가 인간의 자연 지배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그 중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이든 어쨌든 우리는 이 못돼먹은 현실과 그 구조를 바꾸기 위해 인간 이외의 생물들, 예를 들어 철새들과도 얼마든지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동지는 누구인가? 일단 최소한으로만 잡아도 농민, 청소년, 철새 이렇게 세 그룹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지금 아지트를 짓고 있다. 철새들의 생존과 농민들의 생활과 청소년들의 미래가 걸린 싸움을 위한 아지트를. 이번에 만들어지는 커뮤니티센터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전초기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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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철새를 상대로 한 시설을 설계하는 행위는 군사시설을 설계하는 행위와 비슷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철새관련시설을 설계하며 주로 쓴 우리들의 개념적 어휘도 ‘잠복’이니 ‘은폐’니 ‘엄폐’니 하는 단어들이었다. 무엇인가를 ‘본다’라는 행위가 철새 탐조 행위든 군사시설의 정찰 행위든 모두 비슷하니까. …… 무엇보다 이 디자인의 주안점을 ‘낮은 포복’과 ‘내외부 공간의 비경계성’ 그리고 ‘동선의 흐름’에 두고 시작하였다. 단층으로 설계하여 주진입은 인공대지라 할 수 있는 지붕층에서 이루어지게 하였다. 이 시설을 진입도로 및 토교저수지 제방 보다 낮게 포복시켜 철새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하려 한 것이다. 내부에 존재하는 각각의 시설들도 불명료한 경계를 가지고 혼합되어 있으며, 내외부뿐만 아니라 기능시설들의 활동도 시선적으로 공간적으로 교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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