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죽음과의 만남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세계와 그 속에서의 익숙한 삶의 모습을 산산이 부서뜨린 끔찍한 사건을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에서부터 단절이 발생한다. 한 사건은 모든 것이 철저히 끝장난 것으로 생각되어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어려운 일이다. ‘생존’이란 용어는 트라우마 사건 이후 삶이 중지된 상태를 말한다. 트라우마 사건은 그 이후를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결정적 사건이 된다. 삶은 완전히 다르게 정의되며, 불확실하고 상처받기 쉬운 트라우마 이후의 삶은 늘 죽음이 함께 있음을 뜻한다.(28-29)
나는 신학이 말하는 죽음과 삶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고, 이를 통해 트라우마의 고통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구원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트라우마 속에서도 하느님의 능력과 그분의 현존을 이야기할 수 있는 구원 말이다. 삶과 죽음을 양극단에 놓는(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고 보는?옮긴이) 해석으로는 이런 구원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트라우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삶 속에 남아 있는 죽음, 혹은 삶 속에 만연한 죽음을 설명해야만 한다. (32쪽)
트라우마 경험은 죽음과 삶의 관계를 재구성함으로써 우리에게 익숙한 구원 이야기들에 도전한다. 죽음은 완결된 어떤 것이 아니고, 삶도 새로운 시작이나 출발이 아니다. 삶과 죽음을 서로 반대되는 양극단에 놓은 채 구원 내러티브를 해석하는 한, 트라우마 경험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일은 실패하게 마련이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구원 내러티브는 대개 생명(부활)이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이야기로 단순하게 해석된다. 이런 관점이 어떤 약속이나 희망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생명이 죽음을 극복했다는 단순한 해석은 위험하다. 이런 해석은 새 것이 옛 것을 대신하고, 선이 악을 무찌르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이 마무리되고 새 삶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관점은 곤경에 처한 현실에 대해 얼버무리고 넘어갈 공산이 크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앨런 루이스(Alan Lewis), 코넬 웨스트(Cornel West)와 같은 신학적인 관점을 아우르는 종교학자들은 죽음(십자가)과 삶(부활)에 대한 이러한 관점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이처럼 성급하게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그리스도교 승리주의(triumphalism)와 대체주의(supercessionism)가 될 수 있다. 만약 구원의 생명이 죽음을 이기거나 어떻게든 죽음이 종결되는 행복한 승리의 끝맺음으로 그려진다면,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경험은 이야기되지 않은 채 묻혀 버릴지도 모른다.(33)
트라우마가 주는 통찰은 치유와 구원을 신학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해석학적 렌즈를 만들어 낸다. 그리스도교 내러티브 속 죽음과 삶의 관계는 이 렌즈를 통해 보다 다양한 빛을 발하게 된다. 트라우마는 신학이 반드시 탐구해야 할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 신학을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한 열쇠다.(41)
2장에서는 죽음과 삶 사이에 위치한, 신학적으로 중간의 날이라 부를 수 있는 성(聖)토요일을 살펴보려 한다. 나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 스위스 출신 가톨릭 신학자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역자주))와 아드리엔느 폰 스페이어(Adrienne von Speyr, 1902-1967, 스위스 출신의 가톨릭 의사이며 신비주의 신학자로서 60권 이상의 책을 썼다.?역자주)의 신학을 통해 이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 이들의 신학은 성토요일의 독특한 구원 메시지를 증언하기 위한 중간 영역을 만들어 낸다. 이 렌즈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3장에서는 십자가와 부활 중간에서의 제자들의 활동과 이에 대한 요한복음의 해석을 살펴보려 한다. 이 렌즈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두 경우 모두, 죽음을 넘어서긴 했지만 살아 있다고 단순하게 말하기에는 찜찜한 사건들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활동이 쉽지 않음을 보여줄 것이다. 또한, 이런 해석은 삶 속에 지속되는 죽음의 흔적들을 목격하고 증언해야만 하는 복잡한 상황을 드러낸다. 트라우마라는 렌즈를 통해 앞서 언급한 텍스트들을 해석해 낼 때, 그 텍스트들은 살아남은 삶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생존의 텍스트가 된다. 성서와 신학 텍스트들에 대한 익숙한 해석에서 벗어날 때 텍스트가 증언하는 측면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특정한 해석들을 유지하기 위해 묵살되고 묻혀진 측면들을 추적할 수 있다. (43)
그리스도교의 성서 안에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부활의 이야기와 부활 후의 만남들 안에 있다. 구원하는 능력(redemptive power)은 예수의 죽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경험한 공동체 안에 있다. 브록은 “구원은 화육(성육신)을 고백하는 공동체적인 실천들과, 삶 속의 성령, 그리고 부활과 낙원에 대한 계속되는 성령의 약속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지배적인 구원 이야기는 오로지 십자가에서 성취된 ‘업적’(work)에 비추어 부활을 해석한다. 부활은 승리의 시작이지만, 그 승리는 죽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죽음이 중심에 자리 잡은 그리스도교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이들을 휘두르는 나쁜 소식(bad news)이라는 비판이다.(317-18)
우리에게 익숙한 여러 구원 내러티브들(redemptive narrative)은 그저 심연의 표면을 스치듯 지나친다. 허울 좋게 반짝거리는 구원은 트라우마 생존자들에게 가장 큰 적일 것이다. 이 구원은 약속만으로는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을 약속한다. 많은 이들에게 삶은 죽음을 이긴 승리가 아니다. 그들에게 삶은 죽음 한가운데서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며, 그들의 삶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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