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는 우리를 발명했고 계속 우리를 구속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모든 상상문학을 평가절하하고 특히 셰익스피어를 낮추고 깎아내리는, 소위 ‘문화비평’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문학연구의 정치화는 문학연구를 이미 파괴했으며 학문 그 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는 세상이 애초에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세계에 미쳤다. 원한학파 비평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국가권력이 전부이고 개인 주체성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 주체성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것이라도 말이다. 〔……〕 나는 이런 모든 권력을 팔아먹는 자들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를 위해 에머슨에게로 돌아간다. 누가 근대적 삶의 텍스트를 썼는가? 셰익스피어인가, 아니면 엘리자베스와 제임스 1세 시대의 정치제도인가? 우리가 아는 바의 인간을 누가 발명했는가? 셰익스피어인가, 아니면 궁정과 궁정의 대신들인가?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에 누가 더 많은 영향을 미쳤는가? 여왕 폐하의 제1장관이었던 벌리 경인 윌리엄 세실인가, 아니면 크리스토퍼 말로인가? 「서문: 오염의 괴로움」, ---pp.17~18
이 책을 읽는 합당한 독자, 즉 좌파든 우파든 인민위원이나 이념가가 아니라 어느 정도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자라면 누구든 영향에 대한 불안이 선구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야기, 소설, 희곡, 시 혹은 에세이에서 성취되는 불안이라는 점을 알 것이다. 불안은 기질이나 환경에 따라 후대 작가들에 의해 내재화될 수도 내재화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강한 시는 성취된 불안이다. ‘불안’은?이미지적?시간적?정신적?심리적?관계들의 모체를 함축하는 은유이며, 이 모든 관계는 궁극적으로 방어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 책의 핵심 논점이기도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영향에 대한 불안이 강력한 오독이라는 복잡한 행위, 내가 ‘시적 오류’라고 부르는 창조적 해석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작가들이 불안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들의 작품이 표현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시적 오류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결과이다. 강한 오독이 먼저 존재한다. 이를테면 문학작품과 일종의 사랑에 빠지는 심오한 해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서문: 오염의 괴로움」,---p.26
시의 젊은 시민 혹은 아테네가 불렀던 바와 같이 이피브는 이미 반자연적 혹은 반대적 인간이며, 그의 선구자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시인으로서 불가능한 대상을 추구한다. 이 추구가 필연적으로 시의 왜소화를 포함한다는 것은 정확한 문학사가 반드시 견지해야 할 불가피한 깨달음으로 보인다. 영국 르네상스의 위대한 시인들은 그들의 계몽주의적 후손들이 결코 필적할 수 없으며, 계몽주의 이후 모든 전통, 즉 낭만주의는 모더니스트 그리고 후기 모더니스트 후예들에게서 더 쇠퇴하는 것을 보여준다. 시의 죽음은 어느 독자가 골똘히 생각한다고 재촉되지 않겠지만, 우리 전통에서 시가 죽을 때 그것은 스스로 살해될 것이라고, 즉 자신의 과거의 힘에 의해 살해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정당하게 보인다. 이 책 전체에 함축된 고뇌는 낭만주의가 그 모든 영광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예시적 비극이었을 것이라는 점, 즉 프로메테우스의 기획이 아니라, 스핑크스가 자신의 뮤즈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눈먼 오이디푸스의 자기실패적 기획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눈먼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주는 신이 되는 길을 갔고, 강한 시인들은 선구자들에 대한 맹목을 자기 작품의 수정적인 통찰로 변모시킴으로써 그를 따랐다. 내가 강한 시인의 삶의 주기에서 추적할 여섯 개의 수정 운동은 더 많을 수도 있고, 내가 사용한 이름과 아주 다른 이름을 취할 수도 있다. 나는 이 운동을 여섯 개로 한정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최소한이며 어떻게 한 시인이 다른 시인으로부터 이탈하는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들은 비록 자의적이긴 하지만 서구의 상상적 삶에서 핵심적이었던 다양한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유용하리라고 기대한다. 「서론: 우선권에 대한 명상, 그리고 개요」, ---pp.70~71
이제 변증법적 도약을 해보자. 가령 소위 시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석들은 실수보다도 더 나쁜 것이다. 아마도 다소간 창조적이거나 흥미로운 오독만이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독해가 반드시 클리나맨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정신으로 다시 근본적인 것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시의 연구를 새롭게 하려는 시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시에도 근원이란 없으며 어떤 시도 단순히 다른 시를 인유하지 않는다. 시는 인간이 쓰는 것이지 익명의 광채가 쓰는 것이 아니다. 강한 사람일수록 그의 원한도 강하고, 그의 클리나맨도 더 뻔뻔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독자들로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 우리 자신의 클리나맨을 버리려고 하는가?
나는 새로운 시학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실제 비평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의 시를 그 자체의 실체로 ‘이해’하려는 실패한 기획을 포기하자. 그 대신 시를 시인이 시인으로서 선배 시 혹은 시 전체를 고의적으로 오독하는 것으로 읽으려는 탐색을 추구해보자. 시를 그 시의 클리나맨을 통해 알게 되면 그 시의 힘을 상실하면서 지식을 구매하지는 않는 방식으로 그 시를 ‘알게’ 될 것이다. 제1장 「클리나맨 혹은 시적 오류」,---pp.113~14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육화를 경험할 때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종식시킬지도 모르는 어떤 위험에 대해서 반드시 불안을 경험한다. 영향에 대한 불안이 그토록 무서운 것은 일종의 분리불안이면서 동시에 강박신경증의 시작 혹은 인성화된 초자아인 죽음에 대한 공포이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생각하면, 시가 영향에 대한 불안의 흥분 증가에 대해 운동에 의한 방출로 응답하는 것이라고 (익살스럽게) 볼 수 있다. 그러나?시의 모든 전통, 특히 낭만주의의 주장에도 불구하고?시는 쾌락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험한 상황의 불쾌, 영향에 대한 슬픔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불안 상황의 불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제2장 「테세라 혹은 완성과 대조」,---p.131
나는 이제 시의 내적 관계를 특징짓는 수정률의 연구에 세번째의 것, 즉 상상력의 ‘취소하며’ 동시에 ‘격리하는’ 운동인 케노시스 혹은 ‘비우기’를 추가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자신을 ‘겸허히 낮춘’ 것에 대한 성 바오로의 설명에서 케노시스를 가져온다. 강한 시인들에게서 케노시스는 선구자와의 관계에서 ‘비우기’ 혹은 ‘빠져나가기’가 발생하는 수정 행위이다. 이 ‘비우기’는 해방적인 불연속성이며, 선구자의 영감이나 신성의 단순한 반복으로는 불가능한 그런 종류의 시를 가능하게 한다. 자신 속에서 선구자의 힘을 ‘취소하는 것’은 자아를 선구자의 입장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기도 하며, 자신 속에서 또 자신에게 금기가 되는 것으로부터 후발자-시인을 구원한다. 프로이트는 방어기제와 금기의 전 영역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며, 우리는 금기를 만지고 닦아내는 상황이 케노시스와 관련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제3장 「케노시스 혹은 반복과 불연속성」, ---pp.166~67
시는 자신의 우선권을 결여하고 있음에 대한 시인의 우울함이다. 자신을 낳는 데 실패하는 것은 시의 원인이 될 수 없는데, 이는 시가 자유의 착각에서, 우선권이 가능하다는 인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창조 중의 마음과 달리?만들어진 것이고 그 자체로 성취된 불안이다.
우리는 어떻게 불안을 이해하는가? 바로 스스로 불안해짐으로써이다. 모든 심오한 독자는 어리석은 질문자이다. 그는 “누가 내 시를 썼는가?”라고 묻는다. 따라서 에머슨이 “모든 천재의 작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거부한 생각들을 인식한다?이 생각들은 어떤 소외된 위엄을 갖고 우리에게 되돌아온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비평은 심오한 동어반복의 담론, 자신이 의미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말하는 것은 틀렸다는 것을 아는 유아론자의 담론이다. 비평은 시에서 시로 이어지는 숨은 길을 아는 예술이다. 중간 장 「대조비평을 위한 성명」, ---p.176
피치노의 악마들은 혹성에서 목소리를 가져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존재했다. 이 악마들은 ‘토성’에서 그 밑의 천재에게로 이동해서 가장 관대한 우울을 전달하는 영향이었다. 그러나 사실 강한 시인은 결코 악마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가 강해질 경우 다시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아니 다시 약해질 때까지는 그는 악마가 되며 실제로 악마이다. 앵거스 플레처는 “사로잡힘은 전적인 동일시로 이끈다”고 말한다. 선구자의 숭고에 반대하며 새로 강해진 시인은 악마화, 선구자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능을 지닌 반-숭고를 겪는다. 이피브가 악마화될 때 그의 선구자는 반드시 인간화되며, 새 시인의 변모된 존재로부터 새로운 대서양의 물결이 밖으로 흘러나온다. 제4장 「악마화 혹은 반-숭고」, ---pp.180~81
“죽은 시인들이 다른 이들에게 길을 양보하게 하자. 그러면 우리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 이미 창조된 것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이라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미친 아르토는 영향과 영향에 반대되는 움직임인 오류가 구별될 수 없는 영역으로 영향에 대한 불안을 가져갔다. 만일 후발자 시인들이 그곳까지 그를 따라가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죽은 시인들이 다른 이들에게 길을 양보하는 데 동의하려고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새 시인들이 더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더 중요하다. 선구자들은 우리에게 범람하여 쇄도하고, 우리의 상상력은 그 안에서 익사할 수 있지만, 그런 홍수를 전적으로 피한다면 어떤 상상적 삶도 가능하지 않다. 〔……〕
필사적으로 아라라트 산을 건져 올리려는 아르토는 적어도 예리한 인물이다. 그의 제자들의 소란은 단지 우리가, 예이츠가 말한 것처럼, 어릿광대 옷을 입는 곳에서 살 뿐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여전히 힘 있게 펼칠 수 있는 우리 시인들은 그들의 선구자들이 이제 300년 동안 살아왔던 곳에서, 보호자 거룹의 그림자 밑에 살고 있다.
제6장 「아포프라데스 혹은 죽은 자의 귀환」, ---pp.25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