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우리가 ‘기독교 윤리학’(Christian ethics)에 관해 말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어떤 점에서 기독교 신앙, 실천 및 신학의 맥락에서 옳고 그름, 선과 악, 의무와 가치 등에 관한 우리의 언어를 찾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아마도 ‘기독교 윤리학’이라고 명명된 지도는 ‘기독교 신학’(Christian theology)이라고 명명된 더 큰 지도 위에서 발견되는 영역의 일부에 해당될 것이다. 본 장의 후반부에서 우리가 기독교 윤리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조금 더 언급할 것이다. 이 맥락에서 당신이 직면할 수 있는 다른 용어는 ‘도덕신학’(moral theology)이다. ‘기독교 윤리학’처럼, 이 용어는 기독교적 삶과 기독교 신학의 맥락에 서 도덕성에 관한 연구를 언급한다. 서구 기독교에서, 주로 역사적인 이유들로 인해, ‘도덕신학’에 관해 말하는 로마 가톨릭 교인들과 ‘기독교 윤리학’에 관해 말하는 개신교 교인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이 두 용어는 거의 같은 뜻을 의미한다. p. 18,19.
동성애를 포함하여 성 윤리의 질문들에 관한 공식적인 로마 가톨릭의 교훈은 자연법 사상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논변은 우리의 성적 기관과 성적 욕구가 자연적으로 출산이라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만들어진 질서의 일부이다. 우리가 일찍이 보았듯이, 이 논변은 “인간 생명”(Humanae Vitae)에서 피임의 금지를 지지한다. 동성-성교는 아마도 하나의 목표로서 출산을 할 수 없으며, 이런 이유로 인해, 그것은 자연법에 위배된다. 이런 노선의 논변은 자연법 전통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토마스는 동성애 행위를 ‘자연적이지 않은’(unnatural) 것으로 기술함에 있어서 더 이전의 저자들을 따랐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교의 자연적 형태를 거스르기’(run counter to the natural mode of intercourse betweenmale and female)10 때문이다. 최근의 바티칸 문서들은 동성애 행위를 ‘본질적으로 무질서한’(intrinsically disordered)11 것으로 기술하면서 이런 견해를 반영한다. p.91,92.
19세기와 20세기에, 다양한 기독교 사상가들은 공리주의가 사실상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적 명령의 철학적 버전이라고 주장했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1960년대에, 미국성공회 죠셉 플레처(JosephFletcher)는 본질적으로 행위 공리주의의 한 버전인 ‘상황 윤리’(situation ethics) 이론을 제안했다.19 플레처는, 완전한 도덕적 무법인 ‘도덕률 폐기론’(antinomianism)이라는 정반대의 덫에 빠지지 않고, 그가 엄격하고 절대적인 규칙들을 가지는 어떤 체계를 의미하는 ‘율법주의’(legalism)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는 유일하게 절대적인 것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라는 타협책(중도의 길)을 추구한다. 법률과 도덕적 전통들이 우리를 안내할 것이지만, 우리는 어떤 사랑이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를 미리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플레처가 지적하듯이, “사랑의 결정은 규정적으로가 아니라 상황적으로 이루어진다”(Love’s decisions are made situationally, not prescriptively).20 이제,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혹은 그녀의 선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어떤 사랑이 우리의 상황에서 요구되는지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행동의 과정이 최대 다수를 위한 최대의 선을 유발할 것인가를 산출해 내야 한다. p. 138.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강경한 낙태 반대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성경 본문에 호소할 때, 낙태가 고대 세계의 지역들에서 알려졌고 실천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인공 유산에 대한 직접적이고 명백한 언급들이 없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유산을 초래하는 우연한 부상(출 21:22-25)을 언급하는 본문들이 있다. 우리의 출생 이전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예를 들면, 시 139:13-16), 및 심지어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특별한 개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영감(렘 1:4-5; 눅 1:39-45과 같은)에 대해 언급하는 본문들이 있지만, 이 본문들 중 그 어느 것도 직접적으로 낙태에 관한 현대의 논쟁들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질문들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살펴
보게 되듯이, 그 본문들이 그 논의에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이 본문들과 다른 본문들은 낙태에 관한 기독교적 성찰에 널리 사용될수 있다.
비록 성경이 낙태에 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는 않지만, 낙태에 관한 언급들은 후기 신약 시대부터 계속해서 기독교 저술들에서 발견될 수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의 공식적 교훈들과 신학적 전통들이 다소간 획일적으로 낙태에 반대해 왔다고들 흔히 말한다. 이러한 반대에 대한 하나의 기초는 피임처럼 낙태가 성의 생식적 목적을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기초는 태아 살해가 하나의 살인 형태라는 것이었다. p. 273.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