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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

은닉

리뷰 총점8.2 리뷰 33건 | 판매지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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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6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302쪽 | 470g | 145*220*30mm
ISBN13 9788956055978
ISBN10 8956055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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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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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은 종종 죽음을 대량생산한다.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다만 가끔, 아주 소량의 죽음을 주문생산해야 할 때가 있는데, 세상 모든 정부가 그 주문을 다 받아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분업 없이 수작업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을 해낼 재래식 기술자를 어느 나라나 다 보유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연방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그들 중 하나다. 분업으로 은폐되지 않은 생생한 죽음을 날것 그대로 다루어야 하는 직업.---pp.15~16

내 눈에 비친 은경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경이로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내 눈에 비친 것들 중 가장 경이로운 존재. 그 전까지 봐오던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바뀌는 경계. 그 경계에 서 있는 이정표 같은 사람. 처음부터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그런 게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도저히 그쪽으로 가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새로운 단계.
그러니까 그 마음은 사랑이든 뭐든 다른 이름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걸 원래 의미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은경이. 은경이라는 이름 그 자체. 그뿐이었다.---p.31

“너는 네 취향이 네 것 같지? 세상이 네 머릿속에 그런 착각을 집어넣은 줄도 모르고. 아무튼 말이야, 투입되는 데이터만 충분하면, 음악 취향이나 옷 고르는 패턴 같은 건 물론이고, 어떤 현장요원이 누구를 죽일 때 어떤 칼을 어느 각도로 집어넣는 걸 선호하는지까지 알아낼 수 있어. 너도 예외는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겠냐? 행동만 예측하는 게 아니라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네 내면에 대한 심오한 분석 따위는 아예 시도해볼 필요조차 없이 말이야.”---p.60

연방이 악마를 제작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이 비유라고 생각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권력이 타락해간다는 의미일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중략)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게 뭐가 됐든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실체를 가진 무언가라는 것. 그 판단의 근거는 생각보다 단순하고도 명료했다. 예산이 집행되고 있었던 것이다.---p.88

“전장에서 적진으로 돌격을 할 때 기사들이 들 수 있는 창은 하나뿐이야. 두 개를 든다고 해서 더 강해지는 건 아니거든. 사람 하나에 직선 하나. 그 직선을 되도록 많이 모으고, 모두가 한 방향을 향하게 하는 거. 기수가 든 창은 그런 일을 해. 똑같은 직선 하나일 뿐이지만, 그리고 다들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혼자만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하고 있지만, 그 창 한 개는 전장에 나와 있는 다른 모든 창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강한 무기거든.”
“그게 나라고?”
“그래.”---pp.139~140

악마가 직접 핵잠수함에 장착된 탄도미사일의 안전장치를 만지작거렸다. 디코이 핵잠수함. 핵잠수함의 취향. 가짜 항로들. 가짜 명령신호들. 최근 며칠간의 행적이 담긴 가짜 항해일지. 믿든 안 믿든 일단 대비할 수밖에 없는, 사라진 핵잠수함의 고독한 항로.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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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문학이라고는 하지만 SF소설은 작가에게 거대한 관념의 조탁 능력을 요구한다. 논리와 상상력 못지않게. 순문학 못지않게. 나는 배명훈이 그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이 제일 반갑다. 이만한 지성의 소유자가 한글로 장르소설을 써주고 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소설 『은닉』은 ‘거짓’의 백과사전이다. 거짓의 온갖 양상이 망라된다.
대표적으로 ‘위장’, 또‘허풍’. 그 밖에 등재된 항목들 ?없는 주제에, 있는 것처럼 꾸며 상대를 현혹시키기. 엄연히 있으면서 없는 척하기. 있는지 없는지 확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불안하게 만드는 요령. 시늉, 연막, 연극, 성동격서, 은폐, 은신 및 변신, 미끼로 유인, 가면, 배신해놓고 시침 떼기, 이중스파이, 함정, 꼭두각시, 매복, 위증, 칼을 숨긴 주머니, 음성변조, 억지웃음, 은근히 떠보기, 거울, 가상현실, 흥정, 환각, 조각난 진실의 몇 가지 파편들, 소문, 꿈. 그리고 어쩌면 사랑.
박찬욱 (영화감독)
배명훈이 『은닉』에서 그리는 취향은 권력을 움직이고 세상을 바꾸는 열쇠다. 이미 세상은 우리의 취향을 추적해 행동과 마음까지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배명훈은 한발 더 나아가 취향을 조작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것이 바로 디코이! 데이터베이스에 인공적으로 주입한 가짜 취향과 순수 취향이 뒤엉켜 진짜를 은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인간의 진짜 취향에 녹아 있는 선한 의지력을 믿고 있기에 이 독특한 스토리는 감동의 드라마로 승화된다.
홍성민 (『취향의 정치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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