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해방이 감격스러웠다. ‘이화’라는 이름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입김으로 축출당했던 교수들도 돌아왔는데, 박마리아, 김활란, 김영의, 장영순, 김신실 등 여교수들의 활기가 나를 들뜨게 했다. 나는 이화여대 영문과였다. 동기 중에는 이효재도 있었다. 여고 시절 영어를 거의 배우지 못했던 우리는 기초부터 배워야 했다. 영문과 교수 중에는 김상용 시인의 인기가 최고였다. --- p.31
그때 김활란 박사가 외부의 압력을 못이겨 남자전문학교와 통합했다면 오늘날 같은 세계적인 여자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새삼스럽게 그분의 경륜에 머리가 숙여진다. --- p.36
발신인과 수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 편지의 수신인이 나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YWCA수습간사를 위한 유학 서류였다. 미국 뉴욕YWCA 본부에서 보낸 것이었는데, 초청장과 장학금증서 등 여권 수속에 필요한 일체의 서류가 담겨 있었다. --- p.40
뉴욕공항에는 박에스터 선생이 마중 나왔다. 현지 신문에는 한국전쟁이 매일 집중 보도되고 있던 시기였다. 미국YWCA 국제부직원들은 전쟁에서 빠져나온 나를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 p.44
미국에서 내게 청혼했던 오기형 씨가 연세대 교수로 임용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귀국하고 나서 내게 다시 청혼을 했다. 그의 구애를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뜻하지 않은 장애에 부딪혔다. 박에스터 선생의 만류였다. 일과 결혼생활을 양립하기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 p.56
이대YWCA 학생들은 전담 지도 간사의 부임을 기뻐했고, 수시로 내 사무실을 방문했다. 당시 YWCA 회장은 수학을 전공한 장상이었다. 그의 너털웃음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깊은 신앙과 폭넓은 사고력을 갖추고 있었던 장상은 수업만 끝나면 내 방을 찾곤 했다. --- p.62
내 생애 가장 흐뭇한 마음으로 회고할 때는 세계YWCA 실행위원을 지낸 70년 대이다. 그때의 경험들은 내 시야를 넓혀주었고, 세계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컸다. 이러한 경험이 내가 후에 국회에서 활동할 때 큰 도움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 p.67
세계YWCA 실행위원회에서는 유엔에서 다루는 모든 문제들을 취급했다. 군축, 평화, 교육, 보건, 피난민, 인종, 여성지위, 노동, 청소년, 마약, 가정폭력, 인권 등 모두 짚어 갔다. 나는 한국YWCA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계획 중에 세계YWCA 성인교육 협의회를 서울에서 개회할 것을 제의하여 합의를 이끌어 냈다.--- p.71
아직도 박에스터 선생만큼 위대한 여성을 만나지 못했다. 그만큼 유능하면서도 가슴이 따듯하고 많은 사람의 생애와 생활에 영향을 준 사람을 보지 못했다. 오늘의 한국YWCA가 있는 것은 바로 박에스터라는 위대한 여성을 지도자로 가졌기 때문이다. --- p.73
30년 전 초창기에 BPW(전문직업여성클럽)를 조직하고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등 다소의 수고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정은 회장이 나를 두고 말한 ‘선각자 여성 김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 서울 BPW의 산파역을 한 진짜 공로자는 루실 던함(Lucile Dunham)이라는 미국 여성이었는데,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이 특별한 행운이었다. --- p.77
나는 모선을 떠나 망망대해로 나간 조각배가 된 기분이었다. 마침내 1981년 민정당 전국구 후보 21번을 받았고, 김 회장과 함께 11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나의 관심사는 가족법 개정 등 여성계에서 숙원하는 사안이었다. --- p.93
한가하게 외무부의 조처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내가 관련되어 있던 YWCA와 BPW를 움직여 이 문제에 관한 세미나를 갖도록 작용했다. 사실 이 문제에 중요성을 여성단체도 모르는 상황
이었다. --- p.96
국회에 들어가면서 내가 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에 여성문제 전담부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정부 차원의 여성전담지구를 설치하는 문제는 60년 대부터 여성단체들에 의해 꾸준히 건의되어 왔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대통령 산하 여성지위원회를 두거나 정부에 여성문제 담당부서를 설치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을 보아 온 터였다.--- p.104
여성의 정치참여는 양적으로 수를 증가시키고, 남성의 자리를 쟁취하는 데만 그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된다. 남녀동등은 남성을 닮고 남성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들이 여성의 특성을 살펴서 보다 인간미가 있는 삶의 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장애요소를 제거하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 p.121
국회의원으로서 보람을 느낀 분야 중 하나는 의원외교였다. 나는 IPU(국제의회연맹) 회의에 7번이나 한국대표로 참석하는 특권을 누렸다. 제2분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3선을 했고, IPU에서 여성의원 모임을 정례회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세계YWCA를 통한 국제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을 말할 나위가 없다. --- p.133
이화여대 개교 115주년에 ‘자랑스런 이화인상’을 수상하면서 실감했다. 세상에 많은 상들이 있지만, 모교에서 주는 상만큼 귀하고자랑스러운 상은 없을 것이다. --- p.136
내 어머니가 희생과 굴종의 시대를 살았다면 나의 시대는 여성의 권리와 지위를 찾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고, 나의 딸의 시대는 가정과 사회에서 남녀가 동반자로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세계가 되어 있다.--- p.154
시댁은 기독교 내력이 깊었다. 남편의 큰형 오기병 장로는 ‘살아있는 바울’이라고 불릴 만큼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셨다. 원수를 사랑으로 용서한 그의 기독교 세계관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 p.157
남편은 1953년 봄 학기에 연희대학교 교육학과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33년간 봉직하다가 1986년 정년퇴임한다. 연세대학교 재직한 60년대 중반부터 오직 연구의 길에 몰두한 학자로서 인간교육학을 체계화하였고, 우리나라 교육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구체적인 대안과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 p.164
마음속 깊이 창조주 하나님이 있어 그가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것을 믿고, 내가 태어난 것도 다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왔다.--- p.176
이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것에 정을 붙이고 살아왔는가. 사랑하는 남편, 아내, 자식과 손자들, 다정한 친구와 이웃, 어디 사람뿐인가. 그만큼 생명은 존귀한 것이다.
--- p.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