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01/08 이희인(heen@ktcf.co.kr)
1.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긴 주석에 불과하다는 한 철학사가의 말은, 그대로 서양 문명 전체와 그리스 문명의 관계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문명은 그리스 문명이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 안에서 숨쉬고 뛰놀며 자라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뿐만 아니라 예술, 과학, 정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 문명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리스 문명, 특히 신화가 드리운 그림자가 얼마나 넓고 큰지 때때로 느끼지 못하는 바도 아니다. 수많은 소설, 영화, 학술 용어, 상품 브랜드, 심지어는 거리에서 맞닥뜨리는 카페 이름까지 신화 속 이름들을 수 없이 만나게 된다. 고종석이 영어공용화론을 지지하는 마당에서 말했듯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유산은 서구 열강의 뱃머리를 타고 세계 각지로 퍼졌으며, 원하든 원치 않든 바야흐로 인류의 공동 유산이 되었다.
아시모프판 그리스 신화라 할 수 있는 <신화 속으로 떠나는 언어 여행>에 이러한 자취를 한데 모아놓고 보니, 그 그림자의 넓고 큰 품이 새삼스럽다. <로봇>시리즈로 유명한 20세기 최고의 SF 작가이며, 과학 대중화를 위한 수많은 저술로도 유명한 세계적 석학 아이작 아시모프의 천재성이 영어의 어원학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2.
아킬레스건이라든가, 사이렌, 야누스, 나르시시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의 용어들이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차적인 차용 외에도, 변형과 굴절을 겪어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잡은 단어들의 정체가 밝혀질 때마다, 서양 문명이 얼마나 그리스의 유산에 깊숙이 침잠해 있는지 놀라게 될 것이다.
나의 평범한 일상만 보아도 그렇다. 나는 아침 일찍 '마이다스' ** 일보를 읽으며 배기 '가스'가 가득한 도로를 뚫고 출근한다. '아마존' 같은 웹사이트를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재즈 '뮤지션', '엘라' 피츠제랄드의 노래나 '아프로디테즈 차일드', '스틱스' 같은 락 밴드의 노래를 즐겨 들으며 일을 하고, 식사 후 '박카*' 같은 음료를 따 마신다. 얼마 전 읽기 시작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중도에 포기하고 이문열의 '레떼'의 강을 읽을지, 하루키의 '양을 둘러싼 모험'을 읽을지 고민하기도 한다.
'자이언츠'와 '유니콘스'의 경기를 관전한 후, 집 앞 비디오 숍에 들러 '타이타닉'을 다시 볼지, 아니면 여태 보지 못한 흑인 '오르페'를 볼지, 혹은 여전히 '미스테리'한 영화 텔미섬딩을 볼지 망설이다가, 감미로운 '문' 리버의 선율이 흘러나오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을 집어 든다. 오드리 햅번은 '다이아나' 왕세자비와 함께 나의 '히로인'이다. 비디오를 채 다 보기도 전에 아아, 나는 이 너무나 많은 그리스 문명의 흔적들에 치어 '모르핀' 주사라도 맞은 듯 '카오스'의 꿈속으로 떨어진다. 아아, 나는 정말 그리스인인가?
3.
내겐 두서너 해 간격으로 틈틈이 꺼내 읽어보는 보물 같은 책들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도 그 중 하나다. 많은 책들이 그렇다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는 분명 읽을 때마다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예전엔 그저 무심히 지나치는 돌멩이 같은 것들이 어느덧 귀중한 보석으로 바뀌어 책장마다 빼곡하다. 어릴 땐 9개의 어려운 숙제를 푼 헤라클레스가, 대학시절엔 반항자 프로메테우스에 혹했지만, 이즈음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사슬에 묶인 오이디푸스나 시지프스에 자꾸만 끌린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 갈수록 신화도 내 눈 높이에 맞춰 키가 커져 가는 느낌이다.
각 단어를 중심으로 신화의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그 단어들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꼼꼼히 살피는 이 책은 다른 <그리스 로마 신화>서에 비해 좀 더디게 읽힌다. 영어 어원에 관심 있는 사람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색다르게 읽어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퍽 유용할 것이다. 상표나 상호 네이밍을 고민 중인 사람들은 한번쯤 훑어보다 보면 좋은 이름 하나 건질 수 있을 법하다. 적어도 불행을 잉태한 '타이타닉' 같은 이름을 택하는 오류는 피해갈 수 있을 터이니.
이 책의 출판 연도는 1961년으로 되어 있다. 첫 부분의 '카오스'나 '코스모스', '가이아' 등을 읽다보면 벌써 꽤 오래 전에 출판된 책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90년대를 풍미한 '카오스' 이론이나 '가이아'이론 같은 것의 언급들이 횅하니 비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지식이 더 풍요롭고 고급화될수록 그리스 신화에 내장된 자원들은 더욱 바쁘게 애용되고 빛을 발하는 것 같다.
4.
남극 개발을 위한 우리 나라 탐사기지 이름이 '세종'이라 했던가? 얼마 전 우리 학자가 처음 발견한 행성 이름에도 똑같이 '세종'이란 이름이 붙은 걸로 기억한다. 그밖에도 세계적 공식 명칭에 붙이는 우리 이름은 '무궁화'나 '아리랑' 등 몇개가 전부이지 싶다.
신화란 민족 문화가 지닌 힘의 척도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좀더 <삼국유사> 같은 우리 신화서를 애독한다면 '달달부득 5호'나, '조신 콤플렉스', '연오랑적인 사랑', '카페 마립간' 같은 이름들이 스스럼없이 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나친 쇼비니즘적 발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