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눈에 어쩌면 난, 되게 후지고 구린 애였을지도 모르겠다.
영어의 영도 몰랐고 졸업한 대학교도 좋지 않았고 심지어 집이 잘사는 것도 아니라서 해외 연수는커녕 해외여행조차 꿈꾸지 못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스무 살 가을,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살아도 될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각의 이유야 많았지만 또렷한 것은,
“넌 할 수 없어, 그 학벌에”
“여자라서 못해, 관둬”
“영어도 못 하는데 나서지 좀 말아라”
주위를 스치는 아무개들이 생각 없이 하는 말들이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내가 할 수 없다고, 하면 안 된다고 말리던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중 하나가 해외로 대학원 가기였고.
네덜란드에서 석사 졸업을 하고 지금 막 한국에 돌아왔다. 그래서 지금은 뭐하냐고?
네덜란드 광고회사 한국 오피스에서 근무 중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건 바로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당신에게 공유하는 것.
고백하건대,
나도 당신 같았다.
대학교 간판에 고개를 떨구었고, 수백 번 군대 같은 회사를 관두고 싶었고, 돈이 부족해서 유학을 포기하려 하기도 했었다. 너는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주려고 발악하기도 했다.
“이젠 당신 차례야. 이 책과 함께 원하는 것을 계획 세우고 용기를 내길 바라. 의지와 도전 정신은 당신의 무기. 그리고 기억하길 바라. 실패하더라도 시도하는 것이 제일 아름답다는 걸.” ---「글을 시작하며」중에서
요즘 계속해서 네덜란드 대학원에서 공부한 한국인 졸업생들의 조언을 얻고자 입학처를 통해 연락을 취했는데 드디어 한 졸업자로부터 연락이 온 거다.
기나긴 조언을 해주셨다. 휴게소에서 군산 터미널에 도착하고도 전화는 이어졌다. 그녀가 알려 준 소소한 이야기들은 사실 기억에 남지 않았다. 아니 남기고 싶지 않았다. 되풀이되는 부정적인 소리를 듣고 있자니 30분이 넘는 통화의 의미가 없어졌다. 졸업생에게 듣고 싶었던 스텐댄 대학원의 커리큘럼 이야기보다, 번 외로 네덜란드에서 살아갈 한국인으로서의 현실에 대해 나에게 설명 중이었다. 이런 말도 했다.
“네덜란드에 살고 싶으면 더치 남자친구 만들어요. 만나서 동거해요. 그러면 파트너 비자도 쉽게 나오고 그 비자로 취직도 하고 뭔 걱정을 더 해요!”
내가 딱 싫어하는 소리이다. 남자 만나서 인생 펴라. ---「남자를 만나서 인생을 펴세요」중에서
과거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았기에 상당수의 아시아 요리가 네덜란드 요리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길가를 지나다 보면 인도네시아와 수리남 (또 다른 식민지) 음식점들을 흔히 마주칠 수 있는데 과거의 역사가 한 국가의 식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주고 미래를 만들고 결국 모든 것들이 하나의 유기체로 연결된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먹어보는 인도네시아 요리, 처음으로 고뇌해보는 네덜란드 역사…
처음 만난 요크씨, 처음으로 깊은 대화를 나누는 피터씨까지…
모든 것이 처음이지만 낯설지가 않다. 낯섦보다 앞으로 미래에 대한 기대감 속에 네덜란드라는 곳에 어떻게 흡수되어 나를 가꾸어 나갈지에 대한 생각만이 오롯하다. ---「인도네시아 요리는 동기부여를 합니다」중에서
여행할 땐 돈을 벌며 여행할 수 있는 워홀러가 부러웠다. 어학연수를 할 땐 학위를 밟으며 공부하는 유학생이 부러웠다.
지금 난, 또 다른 이 들이 부럽다. 이 나라에서 직장을 잡고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 나도 석사 졸업을 무사히 하고 이곳에서 직장을 구할 수 있을까? 학교에 입학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시점에 너무 이른 고민인가?
시내에 있는 일본 라멘집에 들러 얼큰한 국수를 시켰다. 매콤한 음식으로 졸인 마음을 풀어야지. ‘호로록’ 면을 먹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요리사도 종업원도 모두 아시아인. 나처럼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겠지?
면을 삶는 아저씨, 주문을 받는 여학생, 서빙을 하는 젊은이 모두 활기차다. 국수의 뜨끈한 국물이 내 몸을 데워 주는 동시에 이곳 사람들의 열정에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그래, 이거야. 잠시만 한국식 마인드를 던져두고 이곳에 스며드는 거야.
열심히, 열심히, 열심히 하다 보면 내가 부러워하던 이 들처럼 이곳에 잘 정착 할 수 있겠지. 나답게! 너답게! ---「도착 후 To do list」중에서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말 필요하고 간절한 순간만 허용되어야 한다. 매번 도움을 받다 보면 도움이라는 자체적 의미를 벗어나 스스로가 상대방에게 의지하게 되는 나약한 존재로 쉽게 전락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움이 정말 필요한 순간을 애초부터 차단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가 좀 더 강해지고 단단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의지: 상대방에게 마음을 기대어 도움을 받다.
의지: 어떠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
의지하지 말고 의지를 가지자! ---「네덜란드어의 중요성」중에서
앞으로 살아가며 맞닥뜨릴 수많은 고난과 역경은 분명 이보다 더 힘들 텐데, 고작 부동산 문제로 어린아이처럼 가슴을 졸이고 있다니.
주체적으로 집을 구해서 계약했던 꿈 많고 용기 있던 나는 어디 가고 웬 쫄보가 여기 있나? 순간의 어려움이 닥친 거라고 그렇게 가냘프고 위태롭게 있을 거니? 역경을 이겨 낼 자신이 없다고? 일단 해봐.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집에만 덩그러니 있는 겁쟁이보다
시도하고 깨지고 무너지고 실패하고 그렇게 성장하는 멋쟁이가 되는 거야. ---「거지 같은 집이지만 사랑했다 」중에서
이 성스러운 졸업식은 학위를 확정 지은 학생들만 참석이 가능하다. 쉽게 말해 논문 통과를 이뤄낸 사람들만 이번 연도 졸업이 가능하다는 것. 그렇게 장작 4개월 동안 시작된 나와 논문과의 사투가 이렇게 빛을 보게 되어 영광스러운 자리에 설 수 있다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논문과 졸업을 통해 대학원에서 해방되는 날이지만 한편으론 다가올 미래가 두렵기만 하다. 울타리처럼, 보호망처럼 내 주위를 감싸줬던 학교에서 벗어나 네덜란드 사회 앞에 당당히 혼자 설 수 있을지...
이렇게 걱정하면서 또 잘 해낼 걸 아는 나 자신을 믿는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최고의 방법이니까.
유일한, 단 하나의 버팀목이니까… ---「석사 논문 그리고 졸업 (Feat. 유일한 버팀목)」중에서
집에 도착해서 음악 볼륨을 한껏 높이고 한국으로 부칠 짐들을 차곡차곡 정리한다. 버릴 물건들과 미련 없이 작별인사를 하니 방안에 뽀얀 먼지가 눈에 들어온다. 작아서 버리려고 한 민소매 티셔츠를 걸레 삼아 방안 이곳저곳을 닦는다. 송골송골 땀이 맺히며 이마에서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땀인지 눈물인지… 그 범벅이 된 액체는 네덜란드에서 다 이뤄내지 못한 내 목표와 미련을 수차례 닦아 내린다. 비지엠이 되어준 벚꽃엔딩과 함께 속 시원히 울고 나니, 마음 청소가 된 듯하다.
인생을 모르겠다... 나에 대해서도 모르겠다.
꿈을 향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니 길이 생겼다. 귀인도 만났다.
물론 실패하고 좌절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길이라고 생각한다.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길 위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 잠깐 길을 돌아보자.
지금까지 당신이 걸어왔던 그 길이 당신을 다시 안내해 줄 것이다.
---「장범준은 좋겠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