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육아를 하는 동안 종종 그런 충동이 들었다. 그런 충동은 짓궂은 누군가가 던진 공처럼 갑자기 날아왔고, 나는 불쑥 떠오른 생각에 놀라고, 당황하고, 슬퍼졌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남편은 성실하고,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아이를 낳고서 소설집이 출판되었다. 나쁘지 않은 상황인데, 종종 어딘가에서 날아오는 우울이라는 공을 맞고 나는 주저앉았다. 우울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마트에서 장 볼 때,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줄 때, 설거지할 때, 갑자기 공격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보았던 산후 우울증에 걸린 산모에 대한 기사를 떠올리곤 했다. 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가 그녀들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 p.4~5
나는 입덧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는 책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골랐다. 영화로도 몇 번 만들어졌지만, 책이 훨씬 더 좋았다.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가볍지 않은 이야기. …… 섬세하고 주의 깊은 구절들을 읽고 있으면, 내가 그들 속에 있 는 것 같고, 동시에 그들의 마음을 헤집어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이러한 경험은 다른 책에서는 좀처럼 하기 힘들고, 그게 어떤 경험 인지 궁금하다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어야 한다.
--- p.33~34
몇 가지 신화를 살펴보면, 이집트 사람들은 신이 손과 성교를 하거나 재채기를 하거나 침을 뱉어서 또 다른 신을 창조한다고 여겼다. 그렇게 태어난 신들이 결합하고, 아기를 낳아서 이 땅의 사람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신의 피에 먼지가 섞여서 사람이 만들어졌다고 하고, 인도 사람들은 우주의 알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알에서 신이 태어났고, 브라흐마와 사라스바티라는 신 사이에서 최초의 사람 마누가 태어났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아기가 생긴다는 과학적 사실을 믿고 있다. 그 설명은 검증된 것이고, 나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의 기원이 신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p.87~88
은호는 돌아오는 길에 아기 띠에서 잠들었고, 집에 도착해서 아기 띠를 풀어도 알지 못했다. 어느새 발진은 가라앉았고, 만약 오늘이 토요일이 아니라면, 동네 소아과에 다녀오고 말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야 그런 생각이 들었고, 나는 소파에 축 늘어져서 한강 선생님의 『채식주의자』를 잡았다. 며칠 전부터 읽고 있던 책이고, 고단한 하루를 보냈지만, 책의 뒷부분이 궁금했다. 책 속 주인공은 깨달음을 얻은 상태이고, 나는 그녀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p.151
은호의 특이한 점은 기억이었다. 은호는 장소를 잘 기억했다. …… 대개의 경우 기억은 추억이지만, 소설가에게는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다.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에는 어릴 적 살던 골목의 간판에 대한 애정 어린 긴 묘사가 이어지고,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에서는 기억의 또 다른 변주인 편지와 사진이 현실과 교직하면서 근사한 무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 책 속의 이야기는 처절하고, 실제 경험한 사람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생생했다. 책 전체가 살아 숨 쉬고 있고, 읽는 동안 수용소의 귀퉁이에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뿐 아니라, 헤르타 뮐러의 문장은 매력적이었다.
--- p.177~179
은호는 30개월에 기저귀를 떼고, 뽀로로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먹고, 영어로 간단한 노래를 흥얼거렸다. 낮에 한두 시간 낮잠 자는 것을 빼면 어른과 다를 바 없이 생활했다. 아기 티를 벗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다가올 사춘기 시절이 벌써 두렵기도 했다. 놀이터에서 엄마들을 만나면, 저 귀여운 아이들이 돌변할 걸 생각하면 무섭다는 말을 하곤 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누구나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처럼 되는 법이니까.
--- p.22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