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기획하고, 글을 쓰고 있는 저도 우울증과 공황 장애로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어머니도 제가 왜 병원에 다녔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모릅니다. 떠올려보면 상담이 계획보다 장기간으로 이어진 것도, 의사 선생님께 항상 듣던 “좀 더 솔직히 말해주세요”라는 말도 모두 제가 솔직하지 못했던 탓이었습니다. 어느 날 일기를 쓰다가 글로는 어느 정도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기획하기 시작했습니다.
--- p.6~7
다만 우울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앞서서 도움을 주려고 하면 때로는 ‘내가 저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나 보다. 다 내 잘못이야’라고 생각하고 더 숨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움을 주기가 쉽지 않을 수 있어요. 때론 다른 사람의 도움을 거부하는 것처럼, 어떤 도움도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사실 그들은 사람들을 잘 돕지만 정작 도움을 받는 것은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함께 버텨주시면 좋겠습니다. 언제까지 버티면 되냐면, ‘내가 이 정도까지 기다려줬는데 왜 아직도 우울한 걸까?’라는 인내의 한계가 왔을 때, 그때 조금 더, 조금 더 버텨주시면 좋겠습니다.
--- p.57
헷갈립니다. 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할 수 없다고 느껴져서인지, 혹은 진짜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건지. 또 내가 이런 이야기를 당신들에게 지속해서 하는 이유가 하기 싫음을 합리화 하려는 건지, 스스로 나는 괜찮다고, 이 정돈 아무렇지 않다고,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다고 최면을 걸고 싶은 건지, 혹은 제발 도와달라는 건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 p.61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나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억지로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고, 수업을 듣고, 밥을 꾸역꾸역 먹고 있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랴 싶었습니다. 나의 정신은 이미 죽은 지 오래인데 몸뚱어리만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더는 내 모습을 꾸며내 숨기지도 못했고, 엉엉 울지도,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미 정신은 죽어 있었으니까요.
--- p.71
출근길 버스 안에서 눈물이 찔끔 났다. 서울 한복판 이 많은 사람 중에 얼굴이라도 아는 사람을 만난다면 부둥켜안고 엉엉 울 것만 같았다.
--- p.78
사실은 죽기 싫었습니다. 그저 내 말을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힘들다고, 엄마가 보고 싶다고 아기처럼 엉엉 울고 싶었습니다.
--- p.99
언제나 들어줄 자신만 가득하고 얘기할 자신은 없는 제가, 혹시나 실수로 제 얘기를 꺼내 남들을 지치게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직도 너무 두렵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우울함을 속으로 삼키고 희석하는 습관을 들이느라 너무 오랜 시간을 우울증과 함께 지내왔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꼭, 가족이나 친구 그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 p.204
사실 나는 우울증 환자들의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왜 그렇게 본인의 깊은 바다로 가라앉는지 이해할 수도 없다. 우울증의 주변인으로서 그들에게 하고 싶은 한 가지 이야기는 이거다. “사랑하는 사람을 감당해내려 하지 마라.” 당신은 절대로 주변인들의 짐이 아니다. 우리는 우울증 환자의 존재를 버겁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당신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아주 튼튼하다. 필요하면 옆에 기대라. 본인이 짐이 될 거라 착각하고 주변인들을 떠나보내려 하지 말았으면 한다.
--- p.217
말보다 위안이 되는 건 우울해도 괜찮다는 확신을 주는 그 사람의 분위기입니다. 괜찮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그 시간 동안 그저 조용히 곁에 앉아 있던 흔들리지 않는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 p.238
제게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던 말은, 혹은 오히려 독이 되었던 말은, “요즘 사람들은 다들 그렇지, 나도 그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 말이 “모두가 그러므로 네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전혀 특별하지 않고 도움 받을 이유도 없어”라고 들렸습니다. 뜻밖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 p.247
알아요.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을 거란 거.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일도 의미가 없을지 몰라요. 그러니까 나도 당신에게 행복하길 바란다, 괜찮을 거야, 나아질 거야, 라는 말을 할 수 없어요. 그 말들의 무의미함도 잘 알고 있어요. 나는 그저 당신이 자신을 지켜주길 바랄 뿐이에요. 조금만 더.
--- p.286
단지 너를 지켜왔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수고 많았다.
--- p.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