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9년 05월 27일 |
---|---|
쪽수, 무게, 크기 | 288쪽 | 514g | 172*235*20mm |
ISBN13 | 9791189426415 |
ISBN10 | 1189426412 |
발행일 | 2019년 05월 27일 |
---|---|
쪽수, 무게, 크기 | 288쪽 | 514g | 172*235*20mm |
ISBN13 | 9791189426415 |
ISBN10 | 1189426412 |
|프롤로그| 1920년대 후반, 세계는 제1장 조선공산당 화요파 조선공산당의 창당 제2차 조선공산당 ML파 조선공산당 당의 해체와 12월 테제 만주의 공산주의 운동 제2장 단일전선을 위하여 삼부의 결성과 활동 민족유일당 건설 삼부통합운동과 유일당운동의 실패 제3장 신간회운동 신간회의 창립 신간회의 조직과 활동 신간회의 해소 제4장 열혈 학생운동 6·10만세운동 학생운동의 성장 광주학생운동의 발단 광주학생운동의 전개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 제5장 민중들의 투쟁 노동운동의 성장 원산총파업 이어지는 파업투쟁들 농민들의 투쟁 청년운동, 여성운동, 형평운동 제6장 계속된 의열투쟁, 그리고… 나석주와 이수흥 장진홍과 조명하 박용만과 김좌진의 죽음 |부록| 4권 연표 4권 인명사전 4권 사료 읽기 참고문헌 |
박시백의 <35년>을 읽으면서 새삼 놀랐던 내용이 있다. 학창시절에는 배우지 못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 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여러 사상들이 봇물처럼 밀려들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친일파'도 '독립운동가'도 저마다 다양한 이념과 사상, 신념, 그리고 이해타산의 결과로 행동하였다. 그 여러 사상 가운데 1920년대 이후 급성장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사상은 바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였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뒤 '소비에트 연방'이 들어설 즈음에 전세계인들은 '마르크스'와 '레닌'에 열광을 했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재건'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긴 미국에서 '대공황'이란 먹구름이 스물스물 올라왔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더욱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점이란 바로 '부의 불균형'이고, '실직자의 증가'였다. 자본주의는 경기가 호황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황이 찾아오면 가장 먼저 '무산자(노동자, 빈자, 프롤레타리아 따위로 불리는 이)'들에게 큰 타격을 안겨준다. 반면에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으로 하는 정책을 앞세우기 때문에 부를 '공평하게' 나누고, 모두가 '근면성실'하면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사상이라고 널리 알려진 덕택에 수많은 무산자들을 들뜨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모두 '실패'하였다는 것을 다 안다. 소련은 해체 되었고, 동유럽 공산국가들은 '자유시장경제'로 체제를 바꾸었고, 중국도 '흑묘백묘'를 핑계대며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서는 '사회주의 사상통제'를 병행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공산주의'를 표방한 나라들은 거의 모두 못 사는 나라의 대열에 선착순 한 셈이다. 땅덩이가 크고 자원과 인력이 풍부한 러시아와 중국은 예외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서구 열강이 내세우는 '제국주의(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심지어 더 큰 힘을 발휘하며 '대공황'이라는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멋진 사상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런 사상들이 '식민지' 처지로 전락한 조선인들에게는 일제(제국주의,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빛나는 희망으로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마르크스레닌 사상'은 조선의 지식인과 학생,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들과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던 여성과 백정 들에게까지 손쉽게 파고 들었고, 그 가운데 '독립운동가'로 혁혁한 업적을 남긴 이들이 꽤나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내용을 '역사책'에서 배운 적이 없다. 남북으로 분단되어 처절한 전쟁까지 치룬 뒤에 '공산당'과 '공산주의', 그리고 '마르크스레닌'이라는 이름은 입밖에도 내어서는 안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른바 '반공주의'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우리는 '공산계열의 독립운동가'를 잊고 살아야 할까?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일까? 내 생각에는 '반쪽짜리 역사책'을 배우는 것은 엄마 아빠 가운데 '한쪽'만 선택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둘 사이가 아무리 철천지원수 사이라고 하더라도 부모의 자식이라면 두 분 모두를 알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언젠가 반드시 통일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도 평화로운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려면 서로 갈라서게 된 까닭도 알아야 하고, 서로 힘을 합쳐 '독립의 꿈'을 실현시키려 노력했던 것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신간회'의 등장은 서로 갈라졌던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하나의 힘'으로 뭉쳐 독립운동을 앞장섰던 대표적인 사건이다. 신간회의 지원으로 원산총파업, 광주학생항일운동 등이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는 점은 우리의 독립운동이 '소수의 항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3·1혁명'과 같은 대동단결과 전국적인 조직망으로 일제의 혹독한 탄압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저력과 독립 의지를 보여준 크나큰 사건이었다.
이처럼 노동자(농민)와 학생들에게까지 독립운동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바로 '공산주의'였다. 하지만 초기의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총독부의 탄압과 밀정의 방해로 제대로 된 활동도 하지 못하고 발각되어 해산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련의 코민테른에 '조선공산당'은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그마저도 여러 계열로 쪼개져서 갈등과 반목만 일삼을 뿐이었다. 코민테른의 지적은 하나로 모아진다. "조선공산당은 몇몇 지식인들의 모임일 뿐, 무산자(프롤레타리아)들과 함께 하지 않는 한 활동을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속빈 강정처럼 지식인들의 모임으로 사상만 뽐내지 말고 힘들고 어려운 이들과 함께 부대끼며 '실천'하는 사상가로 거듭나라는 뼈 아픈 지적이었던 셈이다.
실상 마르크스도 잘 나가는 변호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이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맹점'을 신랄하게 공격하며 이론적으로 악랄한 자본가들의 약탈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는데 앞장 선 '실천가'였기 때문에 그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공산당 지식인들은 계열을 불문하고 일제로부터 온갖 차별과 수탈, 약탈을 당하는 약자들의 편에 서서 도움을 주고 일제의 '제국주의(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가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더랬다.
이 가운데 학생들의 항거는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3·1혁명 때부터 학생들의 항거는 활발했지만, 일제와 총독부의 철저한 탄압에 이렇다 할 운동을 펼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일본인 학생들과 차별을 두고 '식민지 교육'으로 제대로 된 대우마저 받지 않은 상황에 처하자 학생들의 분노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날카롭게 벼려진 셈이다. 그런 와중에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시작되었다. 광주라는 좁은 지역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연대의 힘'까지 보여준 것은 앞서 설명한 '신간회'의 공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에 앞서 조선학생들이 일본학생들보다 더 우수하고 뛰어나다는 자긍심이 저변에 깔려있었던 탓에 일찌감치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버린 '교장 이하 선생님 일동'에게 빅엿을 먹이는 '동맹휴학'으로 실력행사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은 독립운동가로 성장하기 위한 발판으로 수많은 '독서회'를 조성했다. 말 그대로 독서를 하고 토론을 나누는 모임인데, 이런 모임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사상이 바로 '마르크스레닌 사상'이었다. 이른바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한 셈인데, 일제와 총독부는 '공산주의'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시행하였고, 단 한 명의 공산주의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색출과 검거를 철저히 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제국주의(자본주의)'에 가장 활발히 저항한 세력들의 이념이 바로 '공산주의'였던 탓에 자칫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으로 제국주의가 흔들리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목적도 컸던 탓이다. 그 결과, 일본에서의 공산주의자 활동은 '제로'에 가까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달랐다. 일제가 탄압하면 할수록 '공산주의자'는 더욱 똘똘 뭉쳤고, 조선에서 활동이 힘들어지자 만주와 연해주, 중국, 소련까지 활동범위를 넓히면서 독립운동의 기치를 결코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지 탄압이 가혹해지면 가혹해질수록 우리의 항거도 만만치 않았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친일파들의 뻔한 변명을 변변치 못한 핑계로 삼을 수 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이름도 남김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독립운동가 이토록 많았음을 새삼 깨달아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죽은 자의 말없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남은 자의 비겁한 변명'만 듣고서 독립운동가들의 염원을 잊고서 친일적폐들의 무도함에 기죽어 지냈던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아야 한다. 그들의 변명이 결코 '필연'이 아니었으며 '대한민국'이 애초부터 약한 나라가 아니었음도 기억해내야 한다.
이제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은 세계를 선도해나가기 위해서 힘찬 날개짓을 하려 한다. 창공을 훨훨 날기 위해선 두 날개가 힘을 모아야 한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따위로 갈려서 갈등은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서로의 생각의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 독립운동가들도 무수히 많은 파벌로 갈려 반목했더랬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자신의 생각과 신념이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염원에 공감하고 함께 힘을 모았다. 바로 '독립'이라는 하나의 꿈을 위해서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도 서로의 생각과 신념을 고집하며 반목하고 있지만, '세계를 선도할 대한민국'이라는 자긍심으로 힘을 모아야 할 때다. 파벌로 나눠서 서로 갈등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갈등의 끝이 '파국'으로 끝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 "내가 아니면 안 돼!"라는 식은 절대로 곤란하다. 누구든 대한민국을 선진국에서 끌어내려선 안 된다. 바로 그런 심보를 가진 이들이, 대한민국은 약소국이니 미국에 의지하고 일본을 따라하고 중국과 러시아, 심지어 북한까지도 눈치보며 살아야 한다는 '적폐들'을 솎아내야 한다. 반드시 말이다.
4권은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일어난 일들을 다루었다.
이 때 독립운동진영은 크게는 민족주의 계열, 사회주의 계열로 뜻과 바라는 바가 갈리었고, 그 안에서도 활동지역별, 활동방법별, 이념별로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해외 사회주의 계열 안에서 통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결국 합치지 못했다.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여 총질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박용만, 김좌진 같은 투사들이 동포가 쏜 총알에 눈을 감았다. 비극이다. 러시아 공산당에서는 조선공산당 파벌 때문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국내에선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어 작게나마 통합을 이루었다. 신간회는 일제로부터 허가받은 단체였다. 그렇다고 친일단체는 아니고, 잔혹한 탄압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단체명을 新韓會로 정하려고 하였으나 일제가 허락하지 않아 韓을 幹(줄기 간)으로 바꾸었다. 幹은 고목간신古木新幹(늙은 나무에서 새로운 가지가 나옴)에서 따온 말로 예로부터 幹과 韓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혹자는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지 못하여, 저마다 자기 뜻만 옳다고 강하게 주장할 뿐만 아니라, 누가 지휘자가 되어야 마땅한가를 다투고, 나라가 망한 마당에 같은 편끼리 싸우는 모양을 보면서, 조선놈들은 이래서 안 돼, 조선놈들은 엽전이야 하면서 자괴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소견이다. 사람은 머리마다 다 경험과 지식이 다르기에 생각도 다르다. 다름을 하나로 합치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 속에서 많은 싸움과 받아들임이라는 산고를 치루고서야 비로소 대동단결하게 되는 것이다. 다툼은 인간이 보편으로 드러내는 본성이지 조선인만 유전자에 각인된 악습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름에 대한 다툼을 부정하고 교조주의로 가면 중세 유럽 카톨릭이 자행한 반인륜 범죄, 마녀사냥을 하게 된다.
광주학생운동은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져야 한다. 기성세대가 패배주의에 빠져 투쟁 동력을 잃어가고 있을 때에도, 미래 세대는 끓는 피가 식지 않았다. 4·19혁명도 그렇거니와 청소년은 결코 어리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