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계속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전개된다. “네가 누구냐”(요 1:19), “무엇을 구하느냐”(요 1:38), ‘네 이름이 무엇이냐’(요 1:42), ‘네가 무엇을 보느냐’(요 1:36).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어느 나무를 보고 있는가? 선악을 아는 나무인가? 골고다의 십자가 나무인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 열매를 보고 있는가? 십자가 나무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을 보고 있는가? 골고다 십자가에 매달린 영원한 생명의 떡, 피와 살을 아낌없이 주시기 위해 그 언덕에서 피를 흘리신 주님을 바라보기 바란다. 나는 진정 어린양을 보고 있는가? 세상 죄 지고 가는 그 어린양을 보고 있는가? 그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다.
---「Ⅰ 이보다 더 큰 영광을 보리라」중에서
주님은 아가페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의지를 가지시고 발걸음을 옮기셨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가페이신 그분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신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신다. 그분은 긍휼과 자비로 찾아오신다. 능력으로 찾아오신다. 그분은 베데스다 연못이 쩌렁쩌렁할 정도로 큰 소리를 발하지 않으셨다. 삶에 지쳐 더 이상 살아갈 기력이 없어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던 엘리야를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과 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으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오셔서 그를 그 실의의 자리에서 일으키셨듯이, 주님은 지금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38년 된 십자가를 벗겨주고 계시는 것이다.
---「Ⅱ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중에서
주님은 ‘모든 문제들이 영적인 것과 연관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중풍병자를 향해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후에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다(마 9:2-6). 백부장을 향해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마 8:10, 13) 하셨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여인을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2) 하셨으며, 길가에서 만난 맹인들을 향해서도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8-29) 하셨다. 이렇게 영적인 부분을 먼저 터치하셨다. 그리고 그다음에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물론 모든 병자들을 그렇게 대하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문제, 그것이 건강 문제든 사업 문제든 자녀의 문제든 간에 ‘이 문제는 영적으로 먼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영이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Ⅲ 네가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중에서
교회를 왔다 갔다 다니지 마라. 교회는 우리가 출석하는 곳이 아니다. 내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 내가 교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건물과 장소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나를 교회로 세우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 주님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즉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신다. 지금 내 곁의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명령이다. ‘내가 이미 살려놓았으니 다가가 풀어주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이다. 그 어떤 선입견, 편견을 버리고 다가가 손을 내밀면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이웃에 대한 관심이 점점 사그라져가는 것, 이것이 영적으로 늙어가는 증상이다. 사람은 늙어갈수록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귀찮아한다. 언제나 만나는 사람끼리만 오순도순한다. 누군가를 향한 아픔, 열망이 없다. 그저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바쁘다. 노화현상이다. 그런 교회는 늙어간다. 우리, 다시 한 번 주님의 사명을 되새기자.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요 11:44). 이 말씀을 붙잡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Ⅲ 네가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중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주님은 지난 3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이미 목적지를 밝히셨다. 뿐만 아니라 조금 전에도 그 목적지를 알려주셨다. ‘내 아버지 집’, ‘거할 곳이 많은 곳’, 맨션, 거처, 이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신 그분이 세상 창조 이후 심혈을 기울이시며 만들어놓으신 곳,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어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은 곳’(계 21:1-2), 그곳이 주님의 목적지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다시 한번 질문에 답하신다. 그곳은 내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라고 말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신다. 우리 또한 그곳에 가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곳으로 갈 수 있는지 그 방법, 길을 제시하신다. 그 길이 무엇인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렇다. 그곳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밝히신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 14장 6절은 모두가 사랑하는 귀한 말씀이다.
---「Ⅳ 나, 너 안에 거하리라」중에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일까?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는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다.”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는 언제 그 차이가 드러나는가? 도끼에 찍힐 때이다. 겉모습은 똑같다. 하지만 도끼날에 찍히는 순간 비로소 본색이 드러난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잘 믿는 자인가의 여부는 평소에는 알 수 없다. 오직 결정적일 때 드러난다. 내 건강, 내 재물, 내 생각,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나갈 때, 바로 그때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붙잡는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잔꾀를 부리고 있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오늘 사회 구석구석에는 지나치게 ‘의인’인 체하는 자들이 많다. 그래서 모든 불의들을 다 깡그리 청산해야 한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몰고 간다. 상대를 향하여 ‘행악자’라고 단죄하며, ‘죽여야 할 자’라며 정죄하는 일들이 너무 일상화되어 있다. 하지만 ‘내로남불’이다. 자신들은 더 냄새나는 일들을 자행하고 있다. 예수님은 과연 행악자였던가? 아니면 예수님을 행악자라 정죄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이 행악자들인가? 나는 내 믿음으로 다른 사람을 제물로 삼는 자인가? 아니면 내 믿음으로 기꺼이 다른 사람의 제물이 되기 원하는 자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내 스스로 제물이 되기를 힘쓰며, 주님처럼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이다.
---「Ⅴ 너,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중에서
이것이 바로 오늘의 부활이다. 이 부활은 언젠가 죽음 후에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부활 신앙은 그때 내 썩어진 육신을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키는 그 정도가 아니다. 지금 내 삶의 현장에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나 여전히 상처를 가지고 계셨다. 우리 상식으로는 그의 상처 난 몸도 완전히 새로워져야 마땅할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몸에는 창 자국과 못 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부활 후에도 예수님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그 몸은 이전의 몸과는 확연히 달랐다. 오늘 우리가 부활을 믿으면 ‘오늘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오늘의 부활에 참여하면 죽음의 골짜기, 사방으로 둘러싸인 캄캄한 현실 속에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된다. 주님이 사방으로 꽉 막힌 그 방을 뚫고 들어오셨던 것처럼 말이다. 희열과 기쁨, 감사와 만족, 평강이 넘치는 자가 된다. 도마는 지금 자신 안에 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주변의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이 모든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변화가 나타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Ⅴ 너,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