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절대로 자기 의라는 방식이 아닌, 은총의 방식으로만 세상에 개입해 들어갈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관여하는 방식도 동일하다. 지금까지 교회의 중요한 성경적 이미지에 대해 살펴보았으나, 이제 논의는 교회의 관계적 정체성의 변증법적 본질로 향하게 될 것이다. 완전히 의로우면서도 완전히 죄된 것으로서, 하나이면서 다수인, 그리고 여기 있으면서 여기 있지 아니한, 지금 그러나 아직 아닌 것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숙고가 주어질 것이다. --- p.60
교회는 그 나라를 향한 출입구이다. 이러한 연결은 아마도 마태복음 16장과 누가복음 9장에서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예수의 응답에서 가장 분명히 증언되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단지 메시야만이 아닌 왕이신 여호와의 존귀한 아들로 고백한다. 예수는 그의 교회를 자신을 메시야/왕으로 깨달은 베드로 (그리고 다른 사도들) 위에 세우실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그리고 이 고백에서 제자들을 따르는 모든 이들은 교회의 구성원이 되며, 또한 그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한다. 교회는 그 나라의 도래와 상관없는 개별적인 것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 나라로 들어가는 출입구로 존재한다. 교회의 “문들”로 들어가는 모든 이들을 위해 그 나라의 문을 열어 주는 열쇠가 지도자들과 구성원들에게 주어진다. 오순절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로의 진입은 약속된 나라 공동체로의 진입을 뜻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행 2:14-19). --- p.121
분명한 예는 주의 만찬이다. 이러한 형식은 여기서 어느 정도 기능에 해당한다. 초대교회 시기 동안, 성찬 형식은 그것을 일종의 식인풍습(carnivalism)이라고 본 이교도들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그 형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대변했던 메시지와 그토록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빵과 포도주같은 상징들이 그것들이 고대 중동 문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든 문화들에서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기에, 교회는 “문화적 동등가들”(cultural equivalents), 즉 각문화로부터 같은 의미를 지니는 상징들을 사용해야 했다고 제안해 왔다. --- p.242
교회가 섬기는 공동체를 창조하는 데 성공하는 핵심은 사랑이다. 타자를 사랑하는 데 관한 성경적 생각은 언제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물이다. 요한은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요일 4:19). 이와 유사하게, 타자를 향한 참된 사랑의 섬김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산물이자 응답이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그 성원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의 섬김 안에서 응답하도록 변화된다. 루터는 자신의 책 『그리스도인의 자유』(TheFreedom of the Christian)에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자유로 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순종적인 종이며, 모두에 대해 종속된다.” --- p.320
교회의 역할은 세상을 심판하는 것은 아니라, 섬기는 것이다. 미국을 다시 취하거나 우리가 목회하는 포틀랜드, 오레곤과 같은 도시들을 다시 취하는 것이 미국교회의 자리가 아니라, ‘이마고 데이 공동체’(Imago Dei Community)의 목사 릭 맥킨리(Rick McKinley) 같은 목사가 자주 말하듯, “포틀랜드에서 사랑하는 것”이 미국교회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악한-세상으로부터-우리를-구원하시기-위해-오실-틈새의-하나님이라는 불관여의 신학(theology of disengagement)의 자리에서, 우리는 자신의 적들에게서 예루살렘을 다시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도시문 외곽에 위치한 골고다에서 자신을 주시므로 적들을 하나님께로 받아들이시려고 오신, 동일한 예수에 의해 짜여진 교수대에-있는-하나님이라는 관여의 신학(theology of engagement)을 필요로 한다.
--- p.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