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소원 말해봐.”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원이 뭐야?”
“장난도 아니다.”
“그러니까 소원이 뭐냐고.”
“도망가지 마라.”
“소원이 뭐냐니까.”
“거절도 용납 못 한다.”
녀석의 동문서답. 슬슬 불안해진다.
“그러니까 소원이…….”
뭐냐는 말이 가로채듯 말하는 민우의 한마디로 쏙 들어가 버렸다.
“키스 한 번만 하자.”
단 몇 초간의 기절이 존재한다면 난 지금 그것을 경험했다고 분명히 말하리라. 꿀 먹은 벙어리가 이러할까. 내가 정확하게 듣긴 한 걸까. 민우에게 난 남자다. 거기다 친구이기까지 하다. 너 대체 사내자식 둘이서 뭘 하자고 한 거냐. 내가 잘못 들었겠지. 설마 저 녀석이 나에게 그걸 하자고 했을 리가 없다. 머리에서 채 정리되지 못한 말이 입 밖으로 먼저 흘러나갔다.
“평균이 99.4던데 무슨 수행에서 깎아먹었냐.”
점차 녀석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림같이 무표정의 얼굴이 가면을 씌운 듯 고요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녀석의 입가가 약간 비틀렸다.
“미술 수행.”
“아, 그림 잘 그렸던데, 역시 미술 선생님이 깐깐하다. 나도 미술 수행은 생각보다 점수가 적게 나왔어. 다음 2학기 수행할 때는 잠시 미술 학원을 다니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아.”
“김수영.”
여유로운 폼의 민우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난 그 작은 동작에도 식겁해서 몸이 다 움찔거릴 정도였다. 녀석이 그런 날 찬찬히 내려다보는데 바보 같게도 그 순간에 난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이 녀석 눈이 참 예쁘다고. 나도 어지간히 중증이다. 느긋하게 올라가는 녀석의 입가 탓에 이유 모를 불안을 느꼈다.
“넌 당황하면 화제를 돌리는 타입이냐, 아니면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연극이냐.”
“아니 그게…….”
“분명 말했다. 도망가지 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아서.”
“그럼 다시 말해주지.”
“아니, 그럴 필요까지야.”
“키스하자.”
처음에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보다. 그 키…… 하아, 단어 자체도 너무 무섭다. 그런데 그 키……를 왜 하자고 하는 거냐. 키……는 솔직히 두렵다고. 널 좋아하긴 한다만 키……를 하고 나 심장이 멈추면 어쩌냐.
“방금, 뭐라고?”
“키스하자.”
역시 세 번 듣기엔 심장에 심하게 무리가 가는구나. 최민우, 난 정말이지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 못했다고. 이 녀석은 장난이 아니랬다. 도망도 가지 말라 했다. 거절도 용납 못 한단다. 이 무슨 왕자 같은 말이냐. 너 이렇게까지 멋있어도 되는 거냐. 그럼 오늘 난 내 첫사랑과 첫 키……를 하게 되는 건가. 아, 진짜 돌겠다.
“왜…….”
“내기에서 이긴 건 나다. 그 물음에 대답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넌 내 소원만 들어주면 돼.”
“너 재수 없다.”
녀석이 피식 웃고는 아주 당연한 듯 내 얼굴을 잡고 고개를 숙여왔다. 그러면서 드는 의문 하나. 이 자식 얼굴 각도를 비스듬히 기울여오는 것이. 너 키…… 그거 처음이라며. 왜 능숙해 보이는 거냐.
“자, 잠깐.”
더 가까이 오지 못하게 민우의 가슴에 손을 얹고 힘을 주었다. 약간 여유를 잃은 녀석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현으로 한쪽 눈썹을 씰룩인다.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는 눈빛이다.
“또 뭐야.”
“너 해본 적 없다며?”
“그래.”
“그런데 너무 자연스럽다.”
오, 신이시여. 이놈 이제 눈웃음까지 친다. 눈이 살짝 웃으며 날 보는데 그냥 아주 이 자리에서 스멀스멀 녹아서 기절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 날 왜 이런 시험에 들게 하시나이까. 울고 싶다.
“김수영, 내가 누구지?”
“잘나신 최민우지.”
“그 잘나신 내가 키스 하나에 쩔쩔매겠냐.”
“두 번 생각해도 너 재수 없어.”
“넌 목소리가 떨리는데.”
제길. 그리고 머리에서 반짝하며 떠오르는 또 다른 의문.
“그런데 너 내가 남자라는 자각은 있는 거냐?”
너무 경황이 없어서 진즉에 물었어야 할 말을 이제 하고 있다. 내가 얼마나 당황하고 제 정신이 아니었는지를 말해주는 한 단면이 아닐까 한다. 혼이 빠져나간 감각치고는 녀석과 옳게 대화는 하고 있지만 입에 마취를 한 것처럼 움직이는 입이 내 것이 아닌 것만 같다. 머리에 쥐가 난다.
“그래.”
“보통은 남자랑 그걸 하지 않는다만.”
“넌 거부감이 없어. 그리고.”
“그리고?”
“너도 키스 한 번쯤은 해봐야지.”
“야, 그래도 같은 남자인 너랑은.”
“네 첫 키스 상대로서 내 외모가 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 무슨 대단한 자신감일까.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범우주적으로 네 미모가 무조건 통한다는 거냐. 야, 상식적으로 생각하라고. 남자와 남자가 키……를 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혹시 내 테크닉을 의심하는 거냐.”
눈썹이 또 씰룩댄다. 이 자식 테크닉이래. 너 그 예쁜 입에서 계속 애먼 말만 하기냐. 오, 맙소사! 명자 고모, 나 여기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하직할지도 몰라. 묘비명에 ‘남자와 키스하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다’ 이따위로는 쓰지 말아 주면 좋겠어.
“이제 질문 안 받는다.”
“그,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난 그거에 거부감도 있고, 좀 찝찝할 것 같은데.”
“밤새우겠군.”
순식간에 뻗어온 녀석의 두 손. 망설임 없이 내 얼굴을 잡은 녀석이 단호하게 입술을 부딪쳐왔다. 심장이 곤두박질치면서 머리가 새하얘졌다. 몇 초간 백색이 되어 버린 시야가 점차 현실로 돌아왔을 때 눈에 보인 건 민우의 얼굴이었다. 사선으로 기울인 얼굴에 한없이 내리깐 눈, 작게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그사이로 소용돌이치는 섹시하고 어두운 기운에 심장이 요동친다. 깎아 놓은 듯 섬세하고도 강인한 얼굴이 너무 아름다웠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킬까 걱정이 되면서도 제동을 걸 수 없다. 이 모든 장면이 느린 화면을 재생하는 슬로우 무비 같았다. 최초의 감각은 녀석의 손이 따뜻하다는 것과 입술에서 느껴지는 열기였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아닌 부드럽고 녹아들 듯한 뜨거움. 단호한 행동과는 달리 닿아오는 입술은 조심스러웠다. 녀석의 입술과 만났을 때의 충격이란. 말을 하고 음식을 먹기 위한 역할을 할 뿐인 입술이 이런 감동을 줄 수 있다니. 새로운 세계를 접한 기분이었다.
어느새 난 눈을 감고 있었다. 녀석의 입술이 내 입술 선을 따라 음미하듯 천천히 지분거렸다. 부드럽게 비벼오는 살의 느낌과 중간 중간 내뱉는 민우의 숨결이 야릇하고도 뜨겁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짧게 빠는 행위에 깜짝 놀라 주먹에 힘이 주어진다. 혀를 내밀어 입술 위, 아래를 덧그리며 다시 전체로 맞닿아 온다. 입술에 느껴지는 녀석의 혀의 감촉이 너무나 생생해서 미칠 것 같았다. 지분거리며 계속 빨아대는 질척이는 소리가 확성기를 튼 것처럼 귀를 울려댄다. 창피해서 돌겠다. 입술끼리의 마찰로 일어나는 쪽 소리가 선명하다. 민망해 죽겠다. 민우 얼굴이 멀어진다고 느끼며 참고 있던 숨을 힘겹게 내쉬려는 찰나.
“흡.”
방심한 틈을 타 입 사이로 혀가 단번에 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물러서려는 몸을 민우의 팔이 가로막는다. 등을 가로지르던 손이 허리를 옥죄어왔다. 치열을 훑던 혀가 사정없이 휘저어 나의 그것을 찾고 있다. 계속 도망가는 날 벌주기라도 하듯 입술을 깨물어 온다. 짜릿한 아픔에 경계가 느슨해지자 당당하게 들어와 혀를 감싼다. 민우의 입에서 만족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농밀하게 휘감아오는 혀의 움직임에 머리털이 쭈뼛 선다. 눈이 바르르 떨린다. 등골이 오싹한다. 그리고 키스는 너무나도 야 했다. 늘 화면에서만 봐오던 키스와 실제의 키스 사이에 얼마나 큰 격차가 있는지, 직접적인 행위의 십분의 일도 채 담지 못하는 화면을 원망하며 그럼 포르노도 거짓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 난 더럽다 생각했던 키스가 온전히 나 혼자만의 터무니없는 착각이었고, 이를 더 부풀려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더럽기는커녕 팽글팽글 도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건 ‘젠장, 너무 좋잖아’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난 절규 중이기도 하다. ‘최민우 이 자식, 너 진정 첫 키스가 맞긴 하냐’라고 말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멀리서 종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고, 운동장에서 학생들의 작은 함성들도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꿈속을 부유하듯 멍하기만 했다. 난 그렇게 녀석의 뜨거움에 취하고 있었다.
“아…….”
숨이 차, 낮게 뱉는 신음성 가까운 소리에 민우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순간, 내 몸은 녀석의 손에 의해 강하게 밀쳐졌다. 시작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런 멈춤이었다. 얼떨떨하다. 키스의 몽롱함에 취해 있던 난 바보같이 눈만 깜빡거렸다. 뭐지. 첫 키스의 부끄러움은 둘째 치고서라도 손바닥 뒤집듯 바뀐 녀석의 태도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짜증스러움에 한소리 하자 싶어 말을 할 참이었다. 그러나 녀석의 얼굴을 본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 역시 몸이 굳어졌던 것이다.
민우의 눈은 무언가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혼란이 뒤섞인 공허한 눈동자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귀신을 본 표정이 저러 할까. 나란 인물은 보이지도 않는지 혼자만의 생각으로 가득 차 보여서 손을 뻗기가 망설여졌다. 불안하다.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 같았다. 아프다. 가슴에 송곳이 박힌 듯 통증이 밀려왔다.
‘대체 왜, 왜……. 당한 건 난데. 너 뭐야.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다. 그런데 왜 꼭 네가 당한 것처럼 그따위 더러운 표정을 짓는 거냐.’
점점 황폐해지는 녀석의 눈과 부들거리는 주먹을 꽉 쥐는 녀석의 행동에 내 심장은 갈가리 찢어졌다. 옥상과 맞닿은 하늘이 토네이도처럼 어지럽게 돌고 돌았다.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이거 꿈이겠지. 꿈이라고 말 좀 해줘. 제발 최민우, 어떤 말이라도 해봐.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녀석의 눈이 싸늘하다.
결국 이거냐. 이렇게 될까 봐 너에게 다가가지 않았던 건데. 내 노력이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지켜온 건데. 어떻게 간직해 온 마음인데. 너 너무 잔인하다.
녀석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꼭 나를 거부한다는 듯, 지금 했던 행동을 후회한다는 듯, 그렇게 등이 말하는 것 같았다. 굽어지지 않는 뻣뻣한 등이 야속하기만 하다. 비참해지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감아 버렸다. 녀석이 가 버리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저벅저벅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싶더니 이제 소리 자체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 어떤 소리보다 소름 끼치는 차가움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녀석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렇게 난 민우에게 외면당했다. 버려지고 만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의 첫 키스는 어땠습니까’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브의 사과를 베어 문 것 같았다고.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