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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에 사는 너

내 심장에 사는 너

신윤희 | 로담 | 2012년 07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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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7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84쪽 | 364g | 128*188*30mm
ISBN13 9788997253449
ISBN10 8997253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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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게 감히 말한 적 없지만, 그녀 안에 꼭꼭 숨겨 두었던 소망은 자기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타오르는 황금빛, 짙은 보라색, 은은하게 빛나는 흰색과 회색, 검푸른 어둠과 부드러운 봄빛, 해질 무렵의 다채로운 색채의 변화, 드넓게 펼쳐진 하늘, 난무하는 색채의 향연을 통해 나의 마음을, 감정을, 그리고 나 자신을 오롯이 담아내는 것.
그것은 선명한 오렌지 빛깔처럼 뚜렷하게 그녀 안에 새겨진 꿈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키워 온 그녀의 꿈을 엄마는 코웃음 쳤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꿈 따위에는 아예 관심 갖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착하게 살라고만 했는데, 꿈은 사치라고 했는데…….
그래서 안으로 숨기고 자꾸 치밀어 오르는 갈망을 삼키고만 살았는데, 그랬는데. 이 남자는 단박에 그걸 끄집어내고 말았다.
“왜 요즘은 그림 그리지 않는 겁니까?”
연우가 양 눈썹을 찡그리자 세진이 갑자기 그녀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대고 냄새 맡는 시늉을 했다. 그의 호흡이 고스란히 살갗으로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 연우는 긴장감에 호흡이 멎을 것 같다.
“흠. 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잔향은 분명히 린시드 용액 냄샌데.”
“무슨 소리예요, 전 만진 적도 없거든요.”
팔짝 뛰면서 부인했지만 연우는 내심 뜨끔했다. 그녀의 방 한구석에는 언젠가부터 화구가 놓여 있었다. 이젤, 붓, 물감, 팔레트, 린시드유, 테레핀, 스케치북과 목탄…… 자기가 산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물건들이 낯설지 않았다. 손에 대는 순간, 뭔가 그립고 정겨운 기분까지 들었던 것이다. 가끔 그것을 어루만질 때면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흘러 넘쳤다. 지워진 시간이 남긴 잔재인 걸까. 그걸 확인하는 것이 두렵다.
“그럼 일단 차연우는 평소에도 가방에 넣어 다닐 만큼 오렌지를 좋아하고, 진짜 오렌지는 그림이지만 현재는 보류. 맞습니까?”
연우가 아무런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자, 기다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세진도 호수를 바라보았다. 맑은 물에서 불어온 청량한 바람이 두 사람의 살갗을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휘저었다. 반짝, 수면에 와 닿는 햇살이 눈부시다.
그렇게 가만히 바람을 쐬던 세진이 다시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연우를 바라보더니 술술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이는 20대 후반? 키는 아담하고, 입시학원에서 국어 과목 가르치고, 그림 보는 거 좋아하고, 한때 꿈이 화가였을 정도로. 그리고 자전거 타고 출퇴근. 남들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서 운동하고, 기분이 나쁘면 사정없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성가신 친구가 한 명 있고, 남자로. 그거 말고 내가 차연우 씨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건 없습니까?”
피식, 웃음이 나와서 연우는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지간히 석호의 첫인상이 안 좋았나? 뭐 상대도 마찬가진 것 같으니 피장파장인가?
“그런데 지금 뭐 하세요?”
비죽비죽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연우가 묻자, 세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대꾸했다.
“뭐 하긴요, 차연우 씨에 대해 내가 남자친구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것들에 대해서 정리하고 있잖습니까. 뭐 틀린 거 있으면 말해요. 빠진 거 있어도 말하고.”
남자친구? 자기가 제대로 들었는지 제 귀가 의심스러웠다. 이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눈만 깜빡이는데 세진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따지듯 물었다.
“어젯밤에 이미 오케이 한 거 아니었습니까?”
“내가요? 언제요? 대체 뭘요?”
어이없는 연우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보통 남자가 키스하는데 가만히 있다는 건 그 상대가 마음에 들었다는 거 아닙니까?”
세진의 목소리가 딱딱했다. 기분이 나쁜지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집요하다.
“그, 그건…….”
“아니면 그냥 아무 남자하고라도 합니까, 설마?”
“뭐라구요!”
연우가 바락 소리를 지르자, 세진이 혀를 끌끌 찼다.
“아닌 거 아니까 흥분하지 말지.”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어요?”
“뭐 아무튼 난 내 여자 아니면 키스 같은 건 안 합니다. 그러니까 내 의견은 충분히 전달됐다고 보고. 게다가 어제 연우 씨도 키스에 꽤 호의적이었으니, 어제부로 차연우는 최세진과 사귀겠다는 암묵적 동의를 한 거 아닙니까?”
“누, 누가 호의적이었다는 거예요, 지금?”
얼굴이 새빨개진 연우가 항의하자, 세진은 자못 자비롭게 웃으며 말했다.
“정정하죠. 호의적이 아니라, 꽤 적극적이었죠.”
“최세진 씨!”
“차연우 씨, 나 싫어합니까?”
“누가 그렇대요?”
말을 하면 할수록 자꾸만 세진에게 말리고 있었다. 제대로 반박도 못하고 얼굴만 붉히는 연우는 약이 올랐다. 이 남자가 좋지만, 그래도 왠지 분하다.
“그러면 된 거 아닙니까? 뭘 그렇게 화를 내는 거죠? 설마 사귄 다음에 키스해야 하는데 순서가 바뀌어서? 연우 씨 그런 거 따지는 사람입니까?”
“지금 장난하세요!”
“그렇게 보입니까?”
“아니에요?”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하죠?”
“왜라뇨! 그렇잖아요. 지금 우리가 몇 번이나 만났다고 사귀네 마네 소리를 해요? 게다가 최세진 씨는 곧 여기 떠날 사람이잖아요. 볼일만 끝나면 다시 서울 올라간다면서요. 그런데 겨우…….”
“겨우 키스 한 번으로 어떻게 이러느냐? 이런. 연우 씨 생각보다 훨씬 리버럴(liberal)한 사람이군요.”
세진이 자못 놀랐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최세진 씨, 주변 평가 중에 묘하게 뺀질댄다는 건 없어요? 있죠?”
“하하하, 들어본 것 같긴 한데.”
연우가 눈을 흘기는데도 세진은 정말로 유쾌하게 웃어댔다.
어쩔 줄 몰라서 연우가 애꿎은 입술만 짓이기고 있자, 세진이 갑자기 팔을 뻗었다. 길쑴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내리훑었다. 흠칫 놀라서 시선을 들자,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그녀를 응시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숨을 내뱉을 수가 없다.
“나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 놀리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불안해하지 말아요. 그러니까 연우 씨. 어젯밤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면, 내가 싫은 게 아니라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줘요. 난 진심이니까.”
이런 직구는 오히려 전의를 상실하게 한다. 단단하게 두르고 있던 것들이 단박에 무장해제 되는 느낌에 연우는 또 입술을 깨물었다.
이 남자가 좋다. 가슴이 떨리고 마음이 설렌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처럼 어느 날 또 그녀만 두고 홀연히 떠나가 버리면 어떡하지? 처음도, 그 다음도, 그 다음도 조금도 익숙해질 수 없었던 버려짐. 그 외로움과 슬픔은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조금도 옅어지지 않는 아픔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이 남자와 시작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의 본능은 세진과 사귄다는 것이 결코 가벼운 연애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를 좋아하게 되고, 사귀고, 그러다 헤어지게 됐을 때 그녀가 얻을 상처는 그 어떤 것과도 비할 수 없으리라.
세진은 곧 여기를 떠날 사람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를 만난다는 것이, 시작한다는 것이 연우는 두려웠다. 자신 없었다.
무언가를 잃고 괴로운 것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지난 세월의 경험이 그녀에게 가르쳐준 지혜대로 연우는 세진을 향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싫어요.”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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