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황금’ 석유는 19세기 중엽만 해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원유를 태워 불을 밝힐 수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돌팔이 의사들이 만병통치약으로 선전하는 별 쓸모없는 시커먼 액체에 불과했다. 석유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긴 것은 백인들이 신대륙에 상륙하기 이전부터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석유를 류머티즘 치료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부 미국인들, 소위 약장수들은 그것을 세네카(Seneca)유라고 불렀다. ---p.14
산업혁명이 시작될 무렵,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 공급원은 제한적이었다. 우선 사람의 노동력을 장시간 같은 일을 시키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결국 소나 말 등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동물을 활용해야 하는데 이들 역시 인간보다 힘은 세지만 생명체이기는 마찬가지라 불편하기는 똑같다. 가장 큰 과제는 지속적이면서 큰 에너지를 공급할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p.32
“어느 날, 나는 이상한 꿈을 꿨다. 꿈속에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나는 식인종들 앞에 끌려 나가, 1시간 안에 재봉 기계를 만들지 못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엄명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했으나 그 기계 발명이 쉽지 않아 나는 마침내 사형장으로 끌려 나갔다. 식인종이 창을 겨누며 다가왔다. 햇빛에 창끝이 반짝이는 순간, 나는 창 끝 조금 넓적한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보았다. 순간, 나는 ‘바로 이거다!’라고 외치면서 번쩍 정신을 차려 잠에서 깨어났다.”---p.76
타자기의 보급을 앞당긴 것은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이다. 그는 1874년 보스턴의 한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는 타자기를 발견하고 어떻게 작동하는 기계인지 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한 여성이 1분당 75타의 속도로 타이핑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구입했다. 그런 후 트웨인은 “타자기는 한 페이지에 엄청나게 많은 단어들을 쏟아놓는다. 물건들을 흐트려 놓거나 여기저기 잉크 얼룩을 남기지도 않는다”고 칭찬했다.---p.88
수의사였던 던롭이 자전거 바퀴를 개발한 것은 아들에게 비싼 자전거를 사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아들은 자전거를 타기만 하면 엉덩이가 아프다고 불평을 늘어놓곤 했는데, 그렇다면 자전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므로 그는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수의사로서 얻은 직업적 경험과 과학적 지식에 힘입어 타이어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곧바로 찾아냈다.---p.116
1912년 4월 14일 밤, 영국 사우샘프턴 항에서 미국 뉴욕으로 향하던 타이타닉 호에서 긴급 구조신호가 발신되었다. 이 무선신호들은 1904년 영국의 존 암브로스 플레밍 경이 발명한 진공관을 이용해 송신되는데, 1906년 미국 마르코니 사에 급사로 입사해, 이듬해 하급 전신기사로 승진하여 근무하던 데이비드 사르노프(David Sarnoff)가 대서양에서 날아온 긴급 SOS 신호를 최초로 수신한 것이다. 그는 즉시 주변 해역에 있던 배들에게 연락을 취했고, 700여 명의 승객이 구출될 수 있었다.---p.134
퍼킨에게는 절묘하게 운이 따랐다. 영어사용권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 빅토리아 여왕이 퍼킨의 보랏빛 물감에 매혹된 것이다. 여왕은 1862년 런던 만국박람회의 개막식에 라일락 빛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눈길을 받았다. 그 연보랏빛 드레스가 바로 퍼킨의 염료로 염색한 것이었다. 그후 각국의 왕실 여성들에게 보라색이 대유행이 되었다. 프랑스의 왕후 외제니도 보라색 드레스를 유행시켰고,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인 알렉산드리아도 자신의 내실을 완전히 연보라색으로 꾸몄다. ---p.206
에를리히가 의약 개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마법의 탄환’을 만들었다는 점도 있지만 그 방법으로 ‘비소’라는 치명적인 독극물을 사용했다는 점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비소는 70∼180밀리그램의 소량을 체내에 섭취하면 중추신경계를 포함한 급성 중독으로 혼수상태, 사망에 이를 정도로 매우 치명적인 물질이다. 조선시대 사약으로 사용되었던 비상의 주성분이며 독살된 중국의 황제 사용한 물질 대부분이 비소이다. 무색, 무취로 음식물 등에 넣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p.218P
메치니코프가 노화와 질병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우연히 읽은 한 보고서 때문이었다. 그것은 너무 나이가 많아 더 이상 살고 싶은 욕망이 없다는 두 할머니에 대한 보고서였다. 할머니들은 하루 종일 고된 일을 마친 뒤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기를 원했다. 메치니코프의 직감은 또 다시 발휘된다. ‘인간에게는 자고 싶은 본능이 있는 것처럼 죽고 싶은 본능이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진짜로 죽고 싶어질 때까지 건강하게 오래 사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p.284
대서양 횡단 해저케이블 설치에서 이제 남은 문제는 케이블이었다. 두 대륙을 잇는 어마어마한 탯줄을 만들기 위해서는 강철 쇠줄처럼 케이블이 끊어지지 않아야 하고, 설치하가 쉽도록 유연성이 있어야 했다. 또한 모든 압력을 견디면서도 비단실처럼 매끈하게 쭉쭉 뻗어야 했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미세한 전파라도 3천 킬로미터 이상 전달되도록 정밀해야 했다. 케이블의 어느 한 군데에라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작은 틈만 생겨도 전파 전달에 차질이 생긴다.---p.320
과학의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눈앞에 두고 포기한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오랜 동안의 실패를 반복하다보면 지칠 대로 지쳐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칼슨은 다른 사람들이 실패라고 생각한 것도 ‘절반의 성공’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성공은 성공하는 사람의 덕목에 의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칼슨과 가까운 사람조차 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칼슨과 함께 10년이나 살았던 그의 아내는 끝내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그를 떠났다. ---p.346
열역학 법칙에서 보면 ‘들어간 것은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헨리 8세의 시종 가운데 변기 담당관은 매우 선망받는 자리였는데, 가장 사적인 순간에 왕과 단둘이 있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왕의 방 열쇠꾸러미를 지녔으며 왕이 옷 입는 것을 거들었다. 한마디로 변기 담당관은 고위직에 오르는 디딤돌이었다. 변기 담당관이 반드시 챙겨야 하는 것은 클로즈 스툴(close stool)인데, 용변을 보는 의자 아래로 양동이나 대야가 숨겨져 있는 도구였다.---p.360
뢴트겐은 X선의 발견으로 최초의 노벨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명예를 얻었으나 바이에른 정부가 제의한 귀족을 뜻하는 ‘폰(von)’ 칭호는 거절했다. 뢴트겐은 X선은 자신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온 인류의 것이 되어야 한다며 특허 신청을 단연코 거절했다. 에디슨은 감동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에 있어서도, 의학에 있어서도, 또 산업계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이 발견으로부터 금전적인 이익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p.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