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라는 관념의 형성과 전개는 여론(opinion publique)과 축을 같이한다. 이들은 모두 왕권 대항논리로서 등장하고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3장은 이 점에 착안하여 고등법원과 왕권의 대립을 축으로 여론 관념의 사회사적 고찰에 할애했다.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공론장의 구조 변동』 이래 시민적 공공권의 성립과 여론(공론)의 탄생을 연결지어 시민적 공공권으로 불리는 담론을 여론(공론)이라고 보는 관점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나는 시민적 공공권의 성립이 계몽 시대의 특색이며 그 논의가 여론 형성에 기여하였음을 부정하지 않지만, 이러한 관점으로는 여론이라는 관념이 힘을 갖게 되는 비밀을 풀 수 없다고 본다. 화폐가 상품의 대립 관계 안에서 탄생하듯, 여론 관념은 담론의 대립 관계 안에서 결과로 형성된다는 것이 나의 입론이다. 고등법원과 왕권 대립의 전개를 상세히 기술한 것은 이를 위해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해 두자면, 고등법원의 주장이 여론이라는 말은 아니다. 쌍방의 대립이 깊어 가는 가운데 초월적인 심급으로서 여론이라는 관념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여론 관념의 초월성과 그에 기초한 힘의 비밀이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여론 관념의 비밀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실체로서가 아닌 담론의 관계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 p.8~9
인구 감소론을 통해 촉발된 인구 추계와 평균여명표의 작성으로 인구, 즉 집단으로서 인간이 인식 대상으로 등장했다. 분명히 개인의 생과 사는 다양한 우연에 좌우되는 개별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 대량의 우연에서 인류라는 무리에 공통의 운명이 생긴다”. 인간이 겪는 사상(事象)을 대량의 현상으로 다루며 규칙성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인구 추계와 평균여명표의 과제였다. 더욱이 인구 추계는 기존의 한정된 지식에서 전체와 미래를 추측하는 과학이며, 사실의 관찰에 기초하여 인간과 사회의 인식을 개척할 것이라고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다.
--- p.23
여론은 초월적인 제3의 심급으로 등장하지만, 동시에 신의 목소리와 달리 인간의 의견이라는 경험적 실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실재성 위에 초월성이 포개져 있다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푸코의 말을 빌리면, 여론은 ‘경험적=초월적 이중체’이며 이것이 여론 관념에 문제성과 효용을 부여한다. 문제성이란, 무엇이 여론인가를 실제 수준에서 확정하고자 할 때 반드시 따라붙게 되는 애매함이다. 이 시대의 논의대로 말하자면 “계몽된 공중의 의견”(공론)을 여론으로 볼지, 아니면 “민중의 의견”(중론)을 여론으로 볼지의 문제와 같다. 콩도르세는 여론을 논할 때 세 가지 의견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사리사욕이 없고 선입견이 없는 사람들의 의견”, 즉 계몽된 공중의 의견으로, 이는 여론에 선행해 법을 만들어낸다. 다른 하나는 정부가 민중을 교도하기 위해 설파하는 의견, 최후에 “민중 안에서 가장 어리석고 가장 가난한 부분의 의견”, 다시 말해 “민중의 편견”이다. 그리고 5절에서 보게 되듯 콩도르세는 정부가 설파하는 의견과 민중의 편견이 표리일체를 이룬다고 보고, 공론을 따라 이 두 가지 의견의 동맹을 타파하는 데서 프랑스 사회의 개혁 가능성을 보았다. 그러나 공론과 중론을 둘러싼 문제는 이후에도 줄곧 따라붙게 된다.
--- p.127
가장권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경제력을 토대로 왕권과 공동체의 지지를 받으며 유지되었지만, 18세기에 들어 그러한 조건이 약화되었다. 도시에서는 우두머리 직인이 되는 길이 좁아져 동직조합 안에서 우두머리 직인과 그렇지 않은 직인, 도제의 대립이 깊어 갔다. 또한 농촌에서는 농촌공동체의 경제적 궁핍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상호부조와 감시로 가족적 질서를 떠받치고 묶어 주던 공동체는 그 실질성을 잃어 갔다. 농민층이 분해되면서 가장권의 물질적 기반을 잃은 빈농층이 대량 속출되는 일이 빈번했다. 더 나아가 심각한 경제적 궁핍 때문에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유입하여 빈민층을 형성하거나 부랑자가 되어 각지를 유랑하는 계층이 속출했는데, 그들에게 가장권은커녕 안정된 가족적 결합도 먼 얘기일 뿐이었다. 이들 빈민이 대량으로 흘러들고 또 농촌에 비해 지연적 공동체의 힘이 약했던 도시에서, 특히나 파리에서 가족적 질서의 동요가 도드라졌다. 18세기 고아와 사생아의 증가에서 그 단적인 현상을 볼 수 있다.
--- p.193~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