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밤이란 것은 어쩌면 내가 의식적으로 살아주지 않아도 살아지는 부록 같은 삶, 그러니까 여분의 인생이거나 혹은 시계로 잴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취해서 기억할 수 없는 시간은 그 사람의 인생에 속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건 아닐까. 그런 다음 어딘가 다른 곳의 시간에 가서 쌓이은 거다. 과학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치 물의 여행처럼. 비어든 땅에 스민 지하수이든 사람의 몸 속의 물이든 오줌이든 혹은 주전자 속의 끓는 물이든 수중기는 다시 구름이고 비이든 간에- 모습만 바뀔 뿐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 그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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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에게 비틀즈는 환각이었고 쓰레기 봉투 같은 것이었다. 환각을 하나 마련해두고 있으면 쓸모 없는 외로움이나 질문 따위는 쓰레기처럼 그곳으로 빨려들어가서 폐기된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현실 속에 그럭저럭 건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게 인생인 모양이었다. 그런 방법을 취미 생활이라고 부르든 변화나 일탈이라고 이름짓든 나는 관심 없었다. 요리를 많이 하는 부엌에서는 쓰레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복잡한 요리를 하지 않는 덕분인지 어쨌든 내 삶에는 찌꺼기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쓰레기 봉투도, 환각이라는 마취도 굳이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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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이 슬프시다면.....
슬프니까요.
모른긴해도. 슬플 때는 시간을 정해놓고 실컷 슬퍼하는게 어때요. 무엇 때문에 그처럼 슬퍼했는지 그런자신이 이해가 안 돼서 어리둥절해질 때까지 말예요.
어떻게요?
그러니까, 물병 속의 물처럼 계속 마셔서 없애는 거예요.
슬픔을요?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여자애한테 차였을 때 그렇게 해본 적이 있어요.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때 나는 어디를 가나 무엇을 보나 여자애가 연상되어 마음이 무거웠다. 피할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므로 난는 아예 적극적으로 여자애 생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여자애가 잘 가던 카페, 잘 먹던 스파게티와 아이스크림 종류, 여자애가 쓰던 향수, 여자애가 좋아하던 영화배우와 노래들, 잘 쓰던 말따위를 줄기차게 떠올렸다. 그러다 보니 얼마 안 가서 그것들이 지겨워지고, 또 얼마 안 가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수백가지의 기억을 하나씩 하나씩 잊으려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니 기억이 아니라 감정 자체를 하나로 뭉뚱그려 잊어버리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되면 여자애와 잘 가던 카페에서 만난 새로운 여자애가 그애처럼 똑같이 과일 파르페를 주문해도 더 이상은 여자을 떠올리지 않게 되죠. 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부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쉽지 않아요. 당신은 슬픔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요. 슬픔은 태어날 때 생기는 것이고 절대 없어 지지 않아요. 마음속 어딘가에 있어요. 꿈속에도 있고요.
아주 어쩌다 책을 읽어도 나는, 이걸 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구나,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생각한다. 이게 그런 거였구나라고 받아들이고는 깨치는 일은 별로 없다. 남의 생각이란 어디까지나 남의 생각이다. 그것을 의심할 필요도 없고 또한 전폭적으로 믿어 언젠가는 변화할 나 자신의 관점에 제약을 만들 필요도 없다. 그것은 [개 기르는 법]을 보든 [장자]를 보든 마찬가지이다. 한때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원리나 진실이란 것은 몇 가지뿐인데 그것의 수없이 많은 사소한 변형을 습득해내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졌다.
--- p.148
소리는 귀불을 간지럽히듯 아주 가까웠고 나직하다. 그것이 내 이름이란 걸 나는 깨닫는다. 나는 미친 듯이 가속페달을 밟는다. 안개 속으로 질주해 들어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볼 필요도 없었다. 고직 그녀뿐이다. 그녀를 절대 놓칠 수 없다. 그녀는 나를 꿈으로 불렀다. 그녀는 시간의 굴레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꿈속으로 도망쳐나왔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그때였다. 눈물을 머금은 내 눈속으로 .......
--- pp.251-252
목적지에 도착한다 해도 반드시 원하는 걸 얻는 건 아니야
--- p.169
많은 사람은 사랑이 있다고 믿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랑이란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것은 부자가 되는 것과 비슷한 욕망의 원칙 속에 있어요. 어떤 사람이 1킬로그램의 금을 가짐으로써 부자가 되기를 원하죠. 그것은 가능해요. 그러나 1킬로그램의 금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법이에요.
--- p.224
다시 월요일이 왔다. 나는 그녀를 기다리지 않았다. 로비에 나가 자판기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다. 대신 나는 원무과의 한 아가씨에게 자판기 커피를 뽑아주었다. 점심도 사주었다. 그 아가씨는 내 부탁이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글쎄요, 이름만 갖고는 바로 찾을 수 없을 텐데요. 차트는 생년월일로 정리가 돼 있거든요. 그러나 나는 그녀가 내 부탁을 들어주리라는 걸 알았다.
오래 걸리지도 않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퇴근 무렵에 그 아가씨가 나를 부르러 왔다. 그녀는 스물세 살이었고 생일은 십일월이었다. 의료보험 대상자는 아니었고 또, 드문 일이지만 주소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전화번호는 있었다. 내 눈길이 잠시 그 위에 머물렀는데 평생 그 숫자를 잊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전화를 걸지 말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 p.121
내 꿈은 나를 빠져나가 어딘가에서 제 나름의 날개짓으로 살아간다. 그 어딘가에서 내 생명은 나비로서 계속되고 나는 여기에서 껍데기로 존재한다. 껍데기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움도 잊었다
--- p.
나는 이제 꿈을 잘 꾸지 않는다. 꿈을 자주 꾸는 것은 어린 아들애이다. 그애는 제 방에서 자다가 깨어 우리 부부의 방문을 두드린다. 엄마, 무서운 꿈을 꾸었어. 도망치다가 높은 데서 떨어졌어. 아내가 아이를 안아주며 말한다. 괜찮아. 엄마가 가서 오르골을 틀어줄게. 그걸 들으면서 자면 천사 꿈을 꿀 거야. 아내는 아이의 손을 잡고 제 방으로 데려다준다. 문 밖을 나가며 나누는 말이 내 귀에 들려온다. 엄마, 어른들은 무서운 꿈을 안 꿔? 엄마도 어릴 때는 무서운 꿈을 꾸었어. 아이가 묻는다. 아빠도? 아내가 대답한다. 그럼. 너도 곧 어른이 되면 무서운 꿈을 안 꾸게 돼. 다 크느라고 그런 거야.
--- p.245-246
-그런데 첫눈에 어떻게 나를 알아봤죠?
-저는 알아봐요.
-우린 딱 한 번 만났고 그것도 몇 년 전이었어요.
-모르겠어요. 어쨌든 당신이라면 알 수 있어요. 어디에 있든.
가야겠어요, 하며 그녀는 초록색 플라스틱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중략) 그녀에게서는 체액이나 지문 따위도 묻어날 것 같지 않았다. 눈물을 배고는 그녀의 몸 속에 들어 있는 어떤 육체적 실체도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식인종이 그녀를 먹는다면 너무 심심하다고 도로 뱉어버릴지도 모른다.
--- p.9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