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창조가 ‘분리’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은 신이 다가갈 때가 아니라 오히려 물러설 때 창조된다. 예술가의 창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담의 반대 방향으로 멀리 나부끼는 신의 머리카락만 봐도 화가의 이런 생각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신과 아담의 손이 마주 닿지 않았다는 것은 서양 세계에서는 익숙하지 않지만,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익히 알려진 초월성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뒤로 물러나서 창조하신다는 ‘침춤’의 개념이다. 물론, 우리는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그와 접촉할 수는 없다. 우리가 다가갈수록 그는 멀어지기 때문이다.---제5화. 물러설 때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아담의 창조」
「터키탕」은 세상에 아주 잘 알려진 그림 중에서 유일하게 원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화가가 그림을 원형으로 연출함으로써 감상자는 열쇠 구멍으로 금지된 실내를 들여다보는 관음증자의 처지가 되어 버렸다. 관음증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 관음증자는 왜 열쇠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일까?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관음증은 쿠르베도 들여다보았던 ‘세상의 기원’에서, 다시 말해 여성의 내밀한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고 싶어 시선으로 내부에 침투하며 쾌감을 느끼는 증세를 말한다. 그러나 관음증자는 자신이 훔쳐보는 ‘대상’에서 쾌락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싶은 욕망, 은밀한 것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느끼고 싶은 욕망이 충족될 때 기쁨을 얻는다. 아마 감상자들도 이 그림을 보고 있는 자신을 ‘의식할 때’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제15화. 훔쳐보기 시나리오 -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터키탕」
「만종」은 죽은 아이처럼 ‘아직 꽃피지 못한, 혹은 이제 겨우 피다가 시들어 버린 것’이라는 주제를 연상시킨다. 「만종」의 세계적 성공의 비결은 분명히 무의식의 정의를 반영하는 ‘태어나지 않은 것’이라는 주제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영혼 깊숙한 곳에 감춰진 공간일 뿐 아니라, 의식하지 못한 채 솟아오르지 못하게 억누르는 충족되지 않는 욕망과 불건전한 추억과 기쁨이 숨어 있는 공간이다. 그처럼 이 그림이 환기하는 것은 그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 단 한 번밖에 찾아오지 못하지만, 의식에서 이미 영원히 잃어버린 것, 하지만 같은 시각에 반복적으로 짧은 음악을 울리는 종소리의 비유처럼 다른 형태로 다시 찾아오는 어떤 것이다. 무의식에서는 모든 것이 울림으로 존재한다.---제18화. 가난한 자들의 운명 - 밀레의 「만종」
그림이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이 되고, 아이는 어머니날을 위해 혹은 이러저러한 동화를 설명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처럼 아이가 리듬에 포함된 주관적 차원을 상실하게 되는 또 다른 원인은 아이가 그린 그림이 ‘훌륭하다’고 평가받고 일정한 틀에 갇히기 때문이다. 일단 틀에 갇히면 어른은 그것이 영원히 고정될 때까지 계속 평가하고, 아이에게 그림은 이제 의미 없는 활동이 되어 버리기에 아이는 창작의 재미를 잃어버린다. 그런 점에서 마티스의 「춤」은 우리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리듬과 색채,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은 본원적이고 주체적인 창작의 재미와 기쁨을 환기하기에 영원한 생명력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제26화. 아이의 리듬감을 찾아라 - 앙리 마티스의 「춤2」
고흐의 극적인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1852년 3월 30일 그가 태어나기 정확하게 일 년 전 사산(死産)된 그의 형 빈센트 빌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삼촌과 할아버지 역시 그와 같은 이름이었고, 그의 아버지 테오도루스는 빈센트의 막냇동생을 자신과 같은 이름(테오)으로 불렀으며, 여자 형제 중 한 명에게는 어머니 이름을, 또 다른 누이에게는 이모(혹은 고모) 이름을 붙여 주는 등 가족의 이름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사산된 그의 형에 대해 알려진 바도 별로 없다. 이처럼, 몇 가지 이름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중복적으로 복잡하게 사용되면서 고흐 가문의 세대 개념은 완전히 무너졌다. 누가 누구인지,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가 자신 또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었으리란 것을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다.---제23화. 저주받은 예술의 표상 - 반 고흐의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오랜 세월 서로 이야기하고, 사랑의 맹세를 나누었지만 결국 모든 말이 헛되다는 자명한 이치를 깨달은 이 남녀의 대화가 보여 주듯이 ‘말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말하는 것은 무언가에 소용이 있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말하는 것이 정보를 전하거나 의사를 표현하는 데에만 소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말이 우리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우리가 말한 것을 들어줄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 주면 좋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말은 내가 말한 것을 내가 직접 들을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상대가 우리에게 말한 것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절대로 말하지 않았던 것, 지금까지 감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것을 그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제28화. 군중 속의 고독을 그리다 -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