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살았던 걸까?” 절망에 휩쓸려 내려갈 때 착한 딸이라든가 성실한 직장인, 사랑스러운 연인이라는 수식어는 허울 좋은 지푸라기일 뿐이었다. 남들한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야. 나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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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은 자신으로 살기 위해 땅에 뿌리를 내린다. 길에 심은 나무는 높게 가지를 뻗고, 새는 하늘을 난다. 두더지는 두더지답게 살기 위해 땅을 파고, 나비는 나비가 되기 위해 고치를 뚫고 나온다. 모두 자신을 위해 살지만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 되고 싶다면 한 순간만이라도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 씨앗과 나무, 새와 나비, 두더지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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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 때문이야 교敎’의 열렬한 신도였다. 성격이 소심해진 것도, 남들 앞에 서면 눈치를 보는 것도, 가난 때문에 결혼을 포기한 것도 모두 엄마 탓이었다. 매일 무기력하고 일상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건 회사 때문이었다. 솔직히 이 생각들이 얼마간 위로가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탓할 사람은 많지만 책임질 사람은 나 혼자. 계속 원망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갈수록 무력한 피해자를 자처할 뿐이었다.(……) “그래, 모두 내 선택이었어!” 남 탓만 하느라고 잃어버린 힘을 되찾기 위해서 나는 단호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솔직한 고백이 이어졌다. “더 일찍 집을 나올 수 있었고, 회사를 그만둘 수도 있었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해도 선택은 내가 한 거야. 아무도 나에게 불행을 강요하지 않았어.” 쓰디쓴 현실을 인정하고 나서야 피해자 역할에서 스스로 걸어나올 수 있었다.
--- p.33
나는 믿는다.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때로는 생의 무게에 압도당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나약함의 반증은 아니다. 위태롭게 흔들려도 언제나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또 다른 나. 그 존재야말로 평생을 함께할 든든한 내 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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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자식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대리 기사가 아니다. 두려움과 고민을 치워주는 청소부는 더더욱 아니다. 진짜 책임져야 할 것은 부모님의 기분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다. 인생의 무게, 마주하기 힘든 두려움, 쓰디쓴 후회까지 결국 자신의 몫이다. 책임지면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책임지지 않으면 자유도 없다.
--- p.47
‘태어날 땐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탯줄을 잘랐지. 이번에는 내 손으로 잘라낼 거야. 더는 사랑을 구걸하며 살지 않겠어.’ 그렇게 선언하는 순간 마음의 탯줄이 떨어져나갔다. 단지 마음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몸이 떨리고, 걸음이 휘청거렸다. (……) 유미야, 유미야, 유미야. 소리 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마음의 좁은 길을 따라 길 잃은 아이가 걸어왔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아이를 품에 안고 이렇게 말해주었다. “내가 부모가 되어줄게. 이제부터 내가 너의 엄마고 아빠야.” 아빠가 떠나고, 엄마가 날 밀어내도 나에게는 내가 있구나.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안도했다. 집을 나오는 게 독립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짜 독립은 마음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 p.54
똑같은 크기의 상자는 서로를 품을 수 없다. 큰 상자라야 작은 상자를 담을 수 있듯이 자신을 끌어안는 순간마다 나는 더 큰 존재가 되었다.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코 일어난 일이었다. 자신보다 큰 존재가 되어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바꿀 것도 미워할 것도 없구나.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 p.93
다행스럽게도 기회는 매 순간 찾아왔다.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할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계속해서 부족한 사람을 자처할 수도 있었고, 자신을 품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존재가 되기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나는 오랜 시간 부족한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사랑’과 ‘이해’라는 새로운 선택을 하고 싶었다.
--- p.93
나는 빈 노트 한 권을 펼치고 첫 줄에 이렇게 적었다. “좋아, 다 얘기해 봐. 도망치지 않을게.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마음 깊은 곳, 찢기고 헤진 그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내려갔다. (……) “사랑받지 못할까봐 두려워……” 마음 깊숙이 숨겨왔던 두려움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또 다른 손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너를 미워한데도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끝까지.” 이날이 처음이었다. 진심이 담긴 사랑의 말을 나 자신에게 건넨 것이.
--- p.102
나는 누구나 자신에게 든든한 비빌 언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끝까지 내 편이 되겠다는 약속, 이것 하나면 충분하다.
--- p.127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면 기다려주는 고마운 사람도 많았다. 뭐야, 서두를 필요가 없었네. 의외였지만 정말 그랬다. 혹시 기회를 놓치면 어쩌지? 다른 사람한테 뺏기면 안 되는데. 나쁜 인상을 남기고 싶진 않아. 이런저런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재촉한 것일 뿐. 나에게 충분한 시간을 배려해 주기로 마음먹은 후로 촌각을 다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에게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배려해 준 뒤에 겪게 된 가장 아름다운 경험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앎 속에 머무는 것이었다. 좋아, 오늘 이만치 일을 했구나. 가뿐한 마음으로 잠드는 밤과 내일 할 일이 기대돼서 눈 떠지는 아침이 찾아왔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이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 평범한 만족이 내게는 커다란 선물이었다.
--- p.144
다음에는 용기를 내서 휴대폰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정말이지 휴대폰을 끄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며칠이 지나자 갑갑한 목줄이 풀린 것처럼 홀가분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삶이야!” 나는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이 기억났다. 아무 때나 사람들에게 허락했던 시간이 실은 ‘내 것’이었다는 사실! 어떻게 이걸 잊고 살았는지 충격에 빠질 만큼 놀라웠다.
--- p.163
지금은 당연한 일이 됐지만, 새로운 규칙을 추가할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유난스러워 보이려나? 건방지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면 어쩌지? 주변을 둘러봐도 자신을 사용하는 방법을 내건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됐을까? 아니다. 뜻밖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프리랜서 8년차가 된 지금까지 규칙을 유지하고 있다.
--- p.190
내 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그 아이는 쉽게 겁을 먹고, 눈치를 보고, 중요한 순간이면 수없이 망설인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정말 괜찮다. 그런 순간이 오면 어떤 모습이든 끌어안을 수 있는 어른인 내가 어린 나에게로 뚜벅뚜벅 나아가면 되니까.
--- p.208
‘마음 챙기는 날’에는 일을 잠시 쉰다. 바쁠 때는 하루 중 서너 시간 정도라도 할애한다. 보통은 꼬박 하루를 보내고, 길면 일주일이 걸리기도 한다. 먼저 깨끗이 씻고, 주변을 정돈하고, 잘 먹는다. 몸이 편해야 마음이 편하다는 말은 언제나 옳으니까. 그리고 마음을 관찰한다. 이 과정은 보통 애정 어린 질문으로 이뤄진다. “뭐가 힘들어?” “가장 큰 고민이 뭐야?” “왜 슬플까?” “혹시 뭐가 두려운 거야?” 말 못할 근심과 두려움이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다정하게 묻고 또 살핀다.
--- p.211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일깨운다. 이 사실을 얽히고 얽혀 있던 엄마와의 관계를 풀면서 깨달았다. 오롯이 나를 위해 시작한 사랑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주변을 돌아보게 했으며,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해주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늘빛이 바다를 물들이듯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물들이기 때문이리라.
--- p.221
처음에는 나 하나만 품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 오롯이 집중할수록 마음이 점점 커다란 원을 그렸다. 처음에는 가족이, 그 다음에는 친구가, 더 나아가 비슷한 고민과 아픔을 지닌 사람들을 향해 마음이 열렸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게 목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신을 넘어서
주변까지 물들인 것이다.
--- p.228